첫 사회생활을 문화예술계에서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예술가'를 위한 장을 만들어 주는 곳답게 동료들 역시 문화적 취향이 남달랐고 내게 다양한 방면으로 영향을 주었다.
일한 지 2년 정도 지나서야 밥도 먹고 술 한 잔도 하며 친해진 동료가 있다. 차분한 말투, 배려 넘치는 말솜씨와 행동, 묘한 자유로운 분위기를 내뿜는 사람. (사실 옷을 센스 있게 잘 입고 다녀서 괜히 더 호감이 간 것도 있다.)보통 업무 얘기만 하는 사이였는데 그날은 무슨 바람이었는지 짧은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 오로지 새로운 사람 만나는 재미 때문에 독서 모임을 열심히 나가던 시절이었는데, 동료는 정말 책을 좋아하는 분이었고 내게 질문했다.
“이번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읽어보셨어요?”
나는 당장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구매했다. 좋아하는 동료와 친해지고 싶어서, 아니 따라 하고 싶어서 매년 특별보급가로 찾아오는 수상 작품집을 챙겨 읽었다. (몇 년 전 즈음 논란이 터지고 소설 주제가 편협해지는 것 같아 조금 멀리하고 있긴 하지만…) 김금희, 백수린, 최은영, 박솔뫼, 김애란 … 동료 덕분에 알게 된 작가들이 전하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이 세상에 나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음에 안도감을 주었다. 때로는 여태 겪어 보지 못한 상황에 날 던져 놓고 나라면 어떻게 할지 과한 몰입과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내 옆자리에 앉아 못 볼 꼴 다 보며 같이 근무하다가 어쩌다 연애까지 해서 정말 이제 ‘못 볼’ 사람이 되어버린 동료도 있다. 영상, 사진 공부를 하고 미술비평을 전공한 이 친구는 내가 늘 갖고 싶었던 예술을 이해하고 탐닉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는 진지하게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다. 장류진 작가처럼 회사원 자아와 분리하여 기막힌 소설을 쓰고 등단하고 뭐 그런 비전이 있던 것 같다. (아마도...)
연애 기간 동안 가장 많이 받은 선물은 책이다. 데이트 코스에 꼭 있던 서점에서 내가 뒤적거렸던 책을 사줬다. 이 친구는 아고타 크리스토프, 제임스 설터 같은 외국 작가 책을 많이 읽었는데 한국 작가 중에선 정영수, 정지돈이 멋있다고 했고 황정은 글이 가장 좋다고 했다. 예상했겠지만 난 그 때 부터 그 친구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00형한테 내 여자친구는 도리스 레싱 책도 읽는다고 말하니까 엄청 부러워했어요”
내가 책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유명 작가의 책도 읽을 줄 아는 사람임을 지인한테 자랑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괜히 뿌듯했다. ‘우린 책 읽는 취향도 비슷하고 문화에 대한 지식수준도 비슷하네. 딱이다 정말’ 이런 걸 느끼면서 말이다. 결론적으로 우린 딱 맞는 인연이 아니었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도 온전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중 잘난체 하는 듯한 특유의 건조한 문체가 인상 깊었던 정지돈 작가가 기억에 남았다. 어느 날 그 작가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 작가가 주로 출몰하는 지역, 친구(지인)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그리고 말장난 같은 유머 감각이 너무나도 헤어진 친구와 비슷해서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책… 빨리 반납..)
주변 동기 부여가 없으면 책에서 다시 손을 놓아 버릴 것만 같다. 책 없이 살지 못하는 아이로 자랐다면 모를까 오히려 TV 없으면 못 사는 아이였던 나는 이렇게라도 배우고 싶은 누군가를 따라 하는 독서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영화 감독이나 배우가 추천하는 책을 읽으며 지적 허영심을 채운다. 유튜브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출판사 편집장이 언급한 책을 눈여겨보았다가 찾아 읽으며 다양한 장르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삶이란 무엇일지 고뇌한다.
지금은 이유리 작가 『좋은 곳에서 만나요』를 읽고 있다. 연필에서 같이 활동하는 친구인 ‘크레파스’가 추천한 소설 『브로콜리 펀치』 로 알게 된 작가의 신작이다. 유쾌하면서도 덤덤하게 현실을 세밀하게 묘사했던 부분이 기억에 남아 이번 첫 연작소설을 기대하며 대여했다. 좋은 친구가 이렇게 또 나의 책 지도의 길 한 갈래를 터주었다. 구전동화처럼 '이 책 재밌어', '이 책 진짜 내용 괜찮아' '이 작가 글 좋아'라는 말로 시작되는 책 추천도 문화적 연대 책임이 아닐지 생각하며 책장을 넘긴다.
by. 연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