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소리 내 읽어 주시던 동화책 전집을 혼자 읽을 수 있게 된 이후, 몇 년 동안 같은 책을 반복하여 읽었다. 가끔 친척 집에 방문하면 그 집에 있는 새로운 동화책에 신나 최대한 많이 읽으려고 욕심을 부렸었다. 새로운 책에 대한 갈망을 부모님이 모르셨을 리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엄마는 위인 특대 전집을 구매해 주셨다. 한국위인 35권 세계 위인 35권 총 70권이었다.
전권 양장본에 삽화와 사진 그리고 인물의 일대기가 총천연색으로 매끈한 종이에 출력 되어있는 고급 도서였다. 그 전집은 오래도록 책꽂이에 꽂혀 나와 동생의 초등학교 생활을 함께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꼭 집에 있는 책 말고도 학교에 가면 책이 있었고 또 선물로도 이야기책을 많이 받아 위인전은 동화책만큼 자주 손을 대진 않았다. 저학년 때는 활자보다는 그림 위주로 훑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저 남아도는 시간 속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활자를 읽고 싶어 읽었다. 재미는 이야기책에 비해 떨어지지만 그래도 그 전집을 좋아했었다. 어린이가 모를법한 어려운 단어들은 옆에 각주로 친절하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 덕분에 자연스럽게 사전의 쓸모와 활용법을 익혀 모르는 단어는 무조건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국어사전부터 영어사전 그리고 옥편까지. 순서와 획을 따라 찾다 보면 동음이의어도 알게 됐다. 찾고자 하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훑다 보면 재밌는 단어를 찾는 건 덤이었다. 마치 게임에서 치트키 없이 이리저리 다니며 지도를 밝히는 scv* 같은 날들이었다.
이제는 어휘력이라는 게임판의 지도를 다 밝힌 줄 알았건만. 여전히 모르는 단어는 존재한다. 단어뿐만 아니라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는 책의 장르도 새로 깨닫는 일이 있었다.
어린이 시절부터 유구한 나의 소설 사랑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것은 독서라기보단 ‘유희’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해 놓았었다. 그러다 얼마 전 독서 모임을 하면서 SF소설을 읽게 되었다. SF 장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읽는 내내 너무 힘들어서 왜 그럴까? 의아했는데 SF소설에도 소프트 SF, 하드 SF가 나뉘고 우리가 읽는 하드 SF로,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에 무게를 두고 쓴 과학 소설이라고 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소설을 읽어도 판타지 장르에는 흥미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느 정도 데이터베이스가 있어 현실에서 실제로 있을법한 세계를 재구축 시키면서 상상하는 것은 좋아해도 원점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들에는 영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같은 이유로 소프트 SF는 영화에서 이미 비주얼화 시켜놓은 것을 가지고 ‘서사’에 집중하면서 읽으면 됐기에 흥미를 느꼈던 것이었다. 30년을 넘게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나의 취향을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워 혼자 호들갑을 떨었다.
사실 글만 보면 맨날 책을 읽을 것 같지만 책보단 영상이나 다른 딴짓에 더 시간을 쏟는 게 사실이다. 나름 책을 꾸준히 읽어왔다고 자랑스러워했는데…… 친구들과 무슨 얘기를 하든 그때그때 유행하는 ‘밈’으로 대화를 이어 나간다. 핸드폰 속 찾아보는 정보는 손가락으로 슥슥 밀어 올려 보고 싶은 단어만 훑어보고 맥락을 파악한다. 각종 숏츠나 릴스에 정신이 팔려 책 읽는 시간도 없는데 글 쓰는 일이야 어불성설이다.
릴스나 숏츠 같은 영상을 아예 끊을 수는 없으니 책 읽는 시간이라도 늘리자. 하고 죄책감만큼 책을 읽으려 노력하는 요즘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읽고 나면 바로바로 ‘독서기록장’도 쓴다. 처음에는 할 말이 없다가도 써 내려가기 시작하면 말이 길어진다. 내가 알아보려고 쓰는 것이기에 불필요한 유행어를 쓰지 않아도 된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니 쓰는 단어도 풍부해져 놀랐다.
사주에 끊임없이 공부해야 먹고 살 팔자라는데. 여태 읽은 책들이 나를 키워왔듯 새로운 게임 지도가 열리고 최종 보스가 나올 때도 쉽게 쓰러지지 않으려면 꾸준히 책을 읽어야겠다.
*SCV- Space Construction Vehicle 건설기계 ; 스타크래프트 게임 테란 족의 일꾼
by. 기차 연필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