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목표는 ‘재미’다.
사전에서 ‘재미’를 찾아본다.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
그럼 ‘즐겁다’는 뭘까?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뭇하고 기쁘다
사전적 정의를 다시 정립한 뒤 재밌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돌이켜본다. 큰 돈을 들여 물건을 산 것? 여행을 떠난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최고의 행복이며 즐거움임을 끊임없이 강요한다. 몇백만 원짜리 가방이나 액세서리를 결제하는 순간은 즐거울지라도 오래 두고두고 즐거운 것은 다른 것이었다. 우리 의지와는 별개로 지금 이 순간도 글을 쓰며 (당신은 읽으며)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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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사의 작은 크로스백이 갖고 싶었다. 한국에선 3,645,000원인 모델이었다. 출장차 갔던 해외에서 자유시간이 주어져 큰 쇼핑몰을 돌다 B사 매장이 있길래 메보기나 할까? 하고 들어갔다.
메봤는데 안 어울리면 미련 없이 내려놨겠건만, 걸쳐보니 더 예뻤다. 하지만 금액은 한국과 비슷했고 환율을 적용하면 오히려 더 비싼 가격이었다. 월급보다 비싼 가방을 떡하니 살 자신은 없었기에 거울을 보며 아쉬워하던 찰나, 직원이 15% 할인해 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통장에 얼마가 있지? 그만한 돈을 어디서 메꾸지? 적금 만기일이 언제였더라?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오가는 와중, ‘물건이 없어서 그렇지 해외 직구 사이트에선 더 쌌던 것 같은데’ 말하자 직원은 ‘네가 찾은 최저가에 우리가 맞춰서 결제해 줄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여기가 용산인가요?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 기회를 놓칠쏘냐 심카드도 없어 쇼핑몰의 비루한 와이파이에 의존해 똑같은 모델의 최저가를 찾아냈다. 인터넷이 더 빵빵했으면 분명 더 좋은 가격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이 가격도 이미 충분하므로. 찾았어! 하고 직원에게 사이트를 보여줬다. 유로와 현지화의 복잡한 환율 계산을 넘어 최종적으로 21.90% 할인을 받았고 관세를 납부한 것까지 치면 70만 원 정도 저렴하게 구매하였다.
그렇게 갖고 싶었던 가방이건만, 생각보다 떨어지는 실용성에 몇 번 메질 않았다.
남은 것은 비싸고 예쁜 가방보단 그 한 점 남은 가방을 누가 사 갈까 봐 (내가 그 매장에 있는 동안 손님은 세 명 내외였다.) 마음 졸이며 느려 터진 인터넷에 다 타버린 인내심에 입이 바짝 말랐던 기억뿐이다.
돌이켜보면 ‘명품’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소비했을 때 남은 것들은 만족감보다는 잃어버릴까 닳을까 전전긍긍하던 일이 더 큰 것 같다. 이재용도 이부진도 아니면서 분수에 맞지 않는 돈을 써댔으니 정해진 결말이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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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벌어야 쓸 수 있다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은 어떨까?
돌아오는 겨울마다 러시아 문호들의 ‘벽돌 책 시리즈’를 읽는다.
긴 이름과 수없이 늘어나는 애칭에만 익숙해지면(근데 그게 쉽지 않을 뿐) 넘쳐나는 도파민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료되는 것은 잠깐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을 땐 톨스토이가 묘사해 놓은 선남선녀들을 상상하며 입맛대로 누굴 대입해서 읽을까 가상 캐스팅하느라 바빴다. 불륜이어도 아름다우면 괜찮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몰아친 안나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지, 책망하는지 마음 정하기도 어렵다. 막장 드라마 같은 줄거리를 한 꺼풀 벗겨보면 한 글자 한 글자 빠르게 읽어내는 것이 송구한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한 인물을 묘사하는 것을 뛰어넘어 인생의 파편들을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 엮어 표현했는지. 이 문장들을 만나기 전엔 의식도 못 했던 작가의 심도 짙은 고찰들을 읽고 난 뒤 혼자 벅차올라 시베리아에서 넘어온 차가운 겨울 공기가 괜히 친근해 잠시나마 겨울을 미워하지 않게 된다.
왜 그렇게 벅차오르는지, 인물과 사건을 읽어 내려가면 소설이 아니라 내 가치관을 읽어내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걸어 놓고 생활을 밝혀줄 문장을 만났음에 누추한 마음을 정리하느라 바빠 그랬으리라.
다 알지만 또 쉬운 유혹에 흔들릴 것이다.
집도 없는데, 가방이 왜 필요해 외쳐도 눈이 달린 동물인지라 예쁘고 취향에 꼭 맞는 물건을 볼 때마다 사고 싶어 할 것이고-
세상에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동물을 넘어 쉽고 간단한 레시피를 정신없이 구경하다 압력에 부서지는 비누 속 숨어있는 반짝이들을 구경하다 보면 내가 보고 싶어 보는 것인지 습관처럼 다음 동영상으로 넘기다 새벽을 맞이할 것이다.
그래도 안다. 순간순간 쉽고 빠르게 뇌를 녹여 먹는 재미일지 당장은 괴로울지라도 진실로 재밌어 이 시간이 끝날까 심장 밑바닥이 간질거렸던 건 진득하게 파고들어 사유했던 순간들임을.
24년엔 느리더라도 당도 높은 재미를 더 많이 찾는 해였으면 한다. 더 이상 누추한 마음이 아닌 나만의 재미, 취향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