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에 찍힌 숫자 앞자리가 바뀌고, 0이 하나 늘수록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단위와 숫자는 사이버 머니로만 존재했기에. 종잣돈은 어디에 투자해야 그 뜻이 완성되는데 적금만 성실히 납부하고 있는 게 꼭 모바일, 인터넷 뱅킹이 못 미더워 은행에서 실거래하고 있는 보수 선두자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엄청난 잔소리를 들을 것이라 각오하고 재테크 선배님이신 엄마에게 고민을 말하니 의외로 엄마는 ‘ETF부터 시작해 봐. 2차전지 관련된 걸로 조금씩’하고 쿨하게 팁을 전수해 주셨다. 당신이 새댁이었을 때 타행 이체 수수료를 아끼기 위해 직접 발로 뛰어다녔다는 이야기를 한 단어도 놓지 않고 재연할 수 있게 듣고 자라온 그 딸은 수수료를 아끼기 위해 은행 창구 직원의 권유에 못 이겨 만든 ISA 통장을 해지하고 중개형 ISA 계좌를 개설하였다. 은행권에서 상품 계좌 개설은 눈감고도 할 수 있는데 주식은 ETF니 S&P500이니 뜻도 모르겠는 복잡한 용어들에 지쳐 몇 번이고 앱을 종료하고 싶은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어렵사리 만들어 놓은 계좌에 ETF 테마주를 야금야금 사 모았다. 천성이 쫄보라 아주 쥐꼬리만 한 금액과 소수 주였지만 앱을 켜고 들어가면 보이는 빨간 빛들이 보기 좋았다.
빨간불은 꺼질 줄 몰랐고 주식이라면 그냥 스쳐 지나가던 모든 정보가 드디어 들리고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이 흉흉하고 안 좋은 소식만 떠드는 시간인 것 같은 뉴스에서 2차전지의 가능성에 대해 보도했고 인터넷 기사도 보니 미래지향적이면서 동시에 안정적인 종목인 것 같았다.
금양을 사고 보니 에코프로가 보였다. 매일매일 최고가를 갱신하던 때라 마치 ‘지금사는 게 제일 최저가’라고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사고 보니 기특하게도 쭉쭉 올라 ETF와는 다르게 대범하게 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야수의 심장은 아닌지라 더 살 수 없는 나의 작은 가슴을 한탄했다. 매수 버튼을 누르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잃어도 되는 금액인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으련만. 관련주들도 자꾸 눈에 밟혔다. 정말 기가 막히게 소액으로 넣어둔 예금 만기일이 끝났고 덕분에 그동안 눈독 들이고 있던 에코프로비엠과, 포스코퓨처엠을 샀다.
‘주식 창을 캡처하고 싶어지면 그때가 팔아야 할 때’라고 들은 건 있어서 계속 올라가는 차트를 보며 캡처는 나중에 해야지 자꾸 행복회로를 돌렸다. 작지만 그래도 공모주 사고팔았던 때보단 더 쏠쏠하게 벌 것 같은데? 기분이 좋아 부모님에게 비싼 밥도 사드렸다. 그 돈이야말로 진정한 사이버머니인 줄 모르고…
다음날부터 주식 창엔 파란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주식장이 파란불이어도 아직 수익을 낼 수 있는 금액이었기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며 외면했다. 차트는 바닥을 뚫으며 내리찍었고 수수료 정도 뗀 거로 치자 합리화했던 금액은 술자리 값, 국내 여행 값으로 늘어났다. 글을 쓰기 위해 정말 오랜만에 확인해 보니 지금은 5시간 이상 비행시간이 걸리는 해외여행에 다녀왔다고 생각해야 할 만큼 커져 버렸다. 저번엔 3시간 비행짜리였는데…
순진했던 시절엔 모든 뉴스를 주식에 대입하는 사람이 징그러웠다. 좋은 뉴스면 관련 주를 사야겠네, 사건이나 전쟁이 나도 자신이 가진 주식과 관련되었는지 빨리 털어내고 싶어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세상을 너무 단편적으로 편안하게 보고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지리, 경제 모든 것은 개별로 진행되지 않고 맞물려 진행된다. 서른이 넘은 성인이 세상을 언제까지고 동화처럼 바라볼 수만은 없는 일임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였다.
비싼 인생 수업을 받은 뒤로 투자 관련 책도 읽고 유료 강의도 들었다. 배우면 배울수록 무지하게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에 포기하고싶었지만 그럴 순 없음을 알아 더디게 따라가려고 시늉은 했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세간의 말에 휘둘려 투자하지 않기로 했건만 ‘엔비디아’가 눈에 들어왔다.
국내 주식장은 너무나 위험 요소가 많으니 미국 주식이 안전하단 말을 들었다. 하지만 떨어질 줄 모르는 환율과 시차로 인해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라 귀찮아서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엔비디아 주를 사기 위해 그 귀찮음을 감내해야 하는가? 고민이 시작됐다.
‘AI라면 미래지향적이니 꽤나 안정적이지 않을까?’, ‘액면분할 전 사둬야 한다’, ‘부자들의 돈 복사기다’ 여러 말들에 사는 것이 맞아 보였지만 에코프로때 마냥 내가 들어가는 순간 곤두박질칠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섰다. 사실 티저 발행할때만해도 왜 못 샀지? 후회했지만 본편 발행을 앞둔 요즘, 뭔가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는 것 같다. 그래도 더 떨어지면 사야하지 않을까 고민을 하는 와중 화성에 있는 리튬 제조공장에서 화재 사고가 났다. 허망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안타까움이 먼저 들긴 했지만 전기차의 안정성에 대한 불신이 떠오르며 관련 주식이 회복되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순서대로 따르자 스스로가 역겨워졌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게 정말 맞는 걸까? 과열된 경쟁사회에서 노동으로 버는 돈으론 부족하다. 주식 투자는 마치 손대지 않고 푸는 코처럼 쉽게 벌 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식 역시 정보 습득과 빠른 판단 등 많은 시간과 경험으로써 발전해 나가는 또 하나의 기술이었다. 역시 해보지 않고 남들이 하는 것만 봐선 모르는 일이다. 팔이피플들이 영수 처리하기 위해 명품 가방 들고 찍은 사진을 올리며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인 양 공구를 하는 행위도 마냥 흉보기엔 꽤 체력이 많이 소비되는 일이며, 보정하고 올리는 것 역시 성실하지 않으면 힘든 일인 것처럼 말이다.
돈을 모으는 데 있어서 쉬운 지름길을 마다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윤리와 여태껏 쌓아 올렸던 가치 판단에 근거하여 세상을 바로 보고 싶다. 나이가 몇인데 순진하게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냐는 생각이 스스로를 채찍질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안다. 선이 악보다 더 어려운 일임을.
착하게 살면 박씨를 물어와 주는 제비를 바라는 것과 로또 1등 당첨을 바라는 것도 비슷해 보인다. 영락없는 소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어찌 되었든 노력 없는 소득에 대한 환상은 깨졌으니 내 그릇값에서 최대치로 살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