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원은 전멸 수준이고 지체 높으신 ‘할저씨’들을 차치하고 사무실에서 내 자리는 좋은 편이다. 파티션은 높지 않지만, 그 덕에 누가 움직이는지 시야를 확보할 수 있고, 듀얼 모니터로 얼굴은 방어할 수 있다. 창문과 떨어져 있어 밖에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모르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책상 무리에서 반대편으로 떨어져 나온 외딴섬 같은 자리가 내 자리다.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땐 사수였던 대리님 옆에 붙어 앉아 업무를 배웠다. 주 업무 중의 하나가 급여 관리였기에 우리 자리는 뒤에 아무도 지나다닐 수 없는 사장실 앞이었다. 다행히 사장실은 나무 가벽이라 사장님이 우리 모니터를 볼 수는 없었다. 사수 대리님의 퇴사, 인사이동으로 꿀 자리를 빼앗겼어도 어떻게든 뒤로는 누구도 지나다닐 수 없는 자리를 사수했다.
(퇴사) 위기의 3, 6년 차도 견디고 다니던 어느 날, 기존 사무실 리모델링을 이유로 자리를 비워줘야 해서 다른 프로젝트팀 사무실에 객식구로 있었던 시절을 지나 지금 외딴섬 자리에 안착했다.
이 상석 아닌 상석을 어떻게 차지하게 되었는가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인사관리부터 사장님 개인 비서 노릇까지 모든 일이 내 몫인 총무이기 때문이다. 이 자리가 마냥 좋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출입구와 가깝기 때문에 손님이 오면 문을 열어주러 가야 하고, 탕비실로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이 자리가 내 자리로 당첨될 수 있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 한들 평균 연령이 다른 회사 명예퇴직 나이인 이곳에서 탕비실에 관한 모든 잡다한 일(사장님 및 손님 음료 대접이 주인)도 전부 여자이면서 총무인 내 몫이니까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도대체 이런 회사를 어떻게 10년 넘게 다닌 건지 이해가 안 가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다. 마음먹은 대로 아직도 하고 자기 사업을 차리는 지인들의 변화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고여 있는 것 같아 불안한 시기도 있었고, 또래 친구 하나 없이 늙다리들 속에 유일한 여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지긋지긋해 회사를 떠나고 싶은 시기도 있었다.
막연한 퇴사 욕구에 지쳐가다 당장 그만둘 마음으로 나름의 업무 인계를 위해 업무를 정리해 보았다. 급여 및 세금 신고 등 루틴한 일정을 빼고, 서식이 존재하는 인사 업무를 제외하고 나면 이걸 어떻게 문서화해서 정리할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계약서 번역, 한국인 및 제3국인 비자 발급을 위한 문서 취합, 업무용 차량부터 부동산, 이행보증, 선수금 환급보증 등 각종 대출과 보험 및 금융 관리, 해외 통관 업무…그리고 어떻게 적어야 할지 엄두가 안나는 사장님 내외의 비서 역할까지…약한 것 하나만 살포시 공개하자면 사장님 식구들의 모든 미국 비자(esta는 애교이고 F1 비자를 시작으로 I-485까지)는 전부 내 손을 거쳐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최소한으로 부끄러운 항목을 쓴 것이다.
이 많은 역할을 혼자 해내는 데도 꽤 오랜 시간 사장님 한마디에 잘릴 수 있는 초파리 같은 목숨이란 사실에 악몽까지 꾸며 살았었다. 냉정하게 보자면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걸 하고 있지만 또 누구나 와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묵묵히 주어진 일을 헤쳐 나가니 10년이 지나 있었다.
2024년 11월이 꽉 찬 10년 근속 달이었다. 이 자리를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부끄럽지만 게을렀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집과 회사는 30분 내외로 갈 수 있는 거리라 아침잠을 확보할 수 있어서다. 도시를 넘나드는 통학과 출퇴근 경험으로 말미암아 짧은 통근 시간만큼 매력적인 조건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리고 아무리 회사 근처가 지긋지긋해서 쳐다도 안 본다지만, 그곳은 대한민국 최고 노른자 땅 중에 하나라 퇴근하고 어디든 쉽게 갈 수 있는 최고의 교통 조건을 갖춘 것도 큰 몫을 차지한다.
다음으로는 특수한 상황을 빼고는 야근할 일이 아예 없다. 덕분에 퇴근 후 마음껏 사생활을 즐길 수 있어서다. 독서 모임이니, 유튜버니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확실한 근무 시간 덕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아마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는 일말의 모든 상황을 견딜 만큼 간절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퇴사를 지를 만큼 회사가 싫은 것도 아니었기도 하고 말이다.
치부를 드러냈으니 다시 장점으로 치장(?)하자면 결국엔 다 버텼기 때문에 이긴 것이다. 무단결근 없이 지각한 적 없다는 소린 못 하겠다… 책임감을 느끼고 열심히 일했다. 코로나에 걸렸을 때도 내가 나가지 않으면 진짜로 모두의 급여가 나가지 않기 때문에 고열을 뚫고 업무를 하고 왔다. 애초에 내 분야가 아닌 일이어도, 생전 처음 하는 일이여도, 있을 리 없지만 정말로 만약에 내가 사업을 한다면 이 일들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겠거니 하는 심정으로 해냈다. 막상 해보면 그렇게 난도 높은 일들이 아니라는 경험치들이 자신감을 더해 근속 연도를 높여 갔다.
단 한 명의 ‘여직원’이라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 사실이 회사 생활을 더 편하게 해줬을 때도 있다. 코딱지만한 사무실 안에 있는 유일한 화장실은 오로지 내 독차지다. 그걸 몰랐던 해외 현장 부장님이 잠깐 한국 지사에서 근무하시게 되었을 때 삼일 정도 그 화장실을 사용하셨는데, 어디서 무슨 이야길 들으셨는지 몰라도 곧 다른 분들처럼 외부 화장실을 이용해 다시 내 전용 화장실이 되었다.
딱히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 평범한 날, 미투로 뉴스가 난리가 났단 이유로 혹시라도 기분 나쁜 일이 있다면 무슨 이유든 네가 옳고 그 상대를 회사에서 쫓아낼 테니 작은 건더기 하나라도 무조건 말하라며 사장님이 주간 회의 시작 전 운을 떼셨다. 거꾸로 가는 가부장이 때로는 시대에 맞게 걷는 법이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회사 10년 치 자료가 다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차곡차곡 쌓은 자료와 업무 지식 덕분에 어렵지 않게 근무하는 것일 뿐, 5년 6년 차만 해도 어려워서 찔찔 울고 다녔던 게 생생하다. 숙달된 직원을 자르는 게 어디 쉬울쏘냐? 하며 소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개꿀직’이 어쩌면 내 자리일 수 있기에 아수라 백작같이 왔다 갔다 하는 마음으로 회사에 다녔다.
그렇다고 ‘나 없이 이 회사는 안 돌아간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10년을 쌓아놓은 인간 데이터베이스가 나이기에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회사는 당장은 힘들지 몰라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잘 굴러갈 것이다. 하지만 회사가 문을 닫으면? 그때는 어떡하지?
한때 품절 대란을 일으켰던 '허니버터칩'의 꿀 함유량은 0.006g이다. 그런 논리라면 단점도 많지만 장점도 많은 내 자리도 꿀자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꿀자리에 언제까지 앉아 있을 수 있을까? 계속 꿀이 발라져 있을 것인지, 쫓겨나지 않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는 이 시기에 경제 성장률이 코로나보다 더 힘든 시기라는데 굳이 뉴스를 보지 않아도 피부로 느낀다. 우리 회사도 작년 말, 한바탕 칼바람이 불었다. 코로나때 역대급 수익을 끌어다준 지사의 폐업, 그로 인한 권고사직. 본사 인원 감축, 내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흉이었던 할저씨들도 권고 사직 또는 비상근직으로 바뀌어 사장님이 본사에 가 계시는 동안 회사는 전부 내 차지가 되어 뱃속 편하게 다닌다. 그러다 보니 연봉 감축 안하는 게 어디냐며 감지덕지한 기분으로 다니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회사나 나나 인연이 다 하면 그 곁을 내어주는 게 맞고 어떻게든 살아지는 법이지만, 만약 진짜 그 날이 온다면 그 빈자리의 깊은 구멍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이 꿀자리에 오래 앉아 있어야 연필도 더 많이 신경 쓸 수 있고, 퇴근 후 여러모로 공사가 다망한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걱정을 사서 한들 아무것도 해결되진 않는다. '돈복'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는 누구나 잘 아는 떼부자가 되는 그 돈복이고 둘째는 살아가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그렇지만 그렇게 큰 돈이 모이진 않고 딱 먹고 살만큼 벌리는 복이 있다고 한다. 그 두 번째 복을 타고났다 생각하는 수밖에.
뭐가 됐든 어딜 가든 내 자리는 분명 꿀이 발려 있을 거라 믿기로 하며 오늘도 이 자리에서 퇴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