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면 돼💰
아르바이트비를 벌기 시작한 뒤 내 소비는 지난 15년 동안 줄곧 독립적이었다. 어떤 디자인이 어울리는지, 어떤 소재가 세탁이 용이한지 얼마만큼의 혼용률이 튼튼하고 따뜻한지를 따져가며 살 수 있기까지 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며칠 전 나일론 천에 가벼운 크로스백을 구매했다. 심플한 디자인에 가격까지 나쁘지 않아 ‘당분간 가방은 안 산다’는 다짐을 어기고 샀다.
출근 준비에 한창일 때 엄마가 가방이 예쁘다며 언제 샀냐 물었다. 어제, 하고 신이나 가볍고 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라며 가방의 실용성을 설명하는데…
‘얼마야?’ 역시나 그 시간이 돌아오고 말았다. 합리적 소비 심판의 시간. 이제 제법 요령이 생겼기에 바로 얼마라고 하지 않고 맞춰보라 하고 답했다. 엄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삼만 오천 원을 불렀다. 역시 원가를 불렀다간 잔소리 3조 12절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에이 엄마 요즘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데. 오만 원 줬어’ 사실 오만 구천 원짜리지만. 그것도 없어서 당근에서 웃돈까지 주고 샀지만…
어렸을 땐 늘 엄마와 함께 옷을 샀지만 혼자 옷을 구매할 수 있게 된 후로는 새 옷을 입을 때마다 엄마는 그 가격을 맞혔다. 물가 상승률이 이렇게 가팔라지기 전 엄마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가격을 턱턱 맞히곤 했다. 그러나 얄궂은 용도의 소품들은 아예 사는 것 자체를 못마땅히 여기셨기에 ‘이벤트에 당첨됐다, 세일해서 샀다. 친구가 선물해준 거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하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물건값을 정직하게 말하고 나면 세상 쓸모없는 것을 어처구니없는 가격에 산 정신 나간 애가 됐기 때문에 더 능글맞고 뻔뻔한 거짓말쟁이가 되어갔다.
엄마는 돈을 흥청망청 쓴다며 아까워했지만 딱히 관여하지 않으셨다. 다만 본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해 번 돈으로 외할머니에게 외투를 사드린 일, 이십오 년 만에 생긴 자기 방에 장롱을 샀지만, 이모의 사별로 혼자 쓸 수 없던 일. 여러 해 전 아빠의 월급과 그 돈의 절반을 저축하고 네 식구 살림까지 해낸 일을 말씀하셨을 뿐이다.
아르바이트가 아닌 취업을 한 뒤 정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와서도 나는 갖고 싶은 것을 제일 먼저로 소비했다. 엄마 생신 같은 큰 이벤트도 용돈을 드리면 다 생활비로 녹여 쓰시는 통에 ‘원하는 것을 골라라’ 해도 고르질 못해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정작 돈 쓴 것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파리 여행을 떠나며 엄마에게 명품 가방을 사드릴 테니 무엇을 갖고 싶은지 보러 가자고 했다. 생신, 어버이날, 설, 추석 용돈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니 제발 고르라는 애원과 함께. 엄마는 뭘 그런 걸 하냐며 말해 놓곤 막상 백화점에 가서는 이것저것 열심히 들어보더니 그중 제일 낮은 가격대에서 실용성이 제일 높은 가방을 점 찍었다.
엄마처럼 자아가 확고한 여성은 흔치 않다. 제일 첫번째로 겪은 여성이자 평생 옆에서 본 사람이라 편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다양한 사람을 겪고 나니 더 확실 해졌다. 비록 결혼과 동시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도 남자 형제가 다섯이나 되는 집안의 공주님이 ‘미스킴’으로 근무했던 6년간의 시간,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서러운 결혼 생활과 시댁과의 관계 속에서도 엄마는 본인의 신념과 목표라는 단단한 벽돌로 꿋꿋이 자기 몫의 성을 쌓아갔다.
그런 줄 알았다. 엄마는 당연히 그런 줄.
엄마가 엄마만을 위해서 돈을 쓴 게 뭐가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떠오르질 않는다. 겨우 떠올려낸 것은 메트리스 하나뿐이다. 그마저도 겨우 혼자 쓸 수 있게 된 방이 얼마 안 가 이모와 나눠 쓰게 됐던 것처럼, 아들의 독립으로 혼자 쓰게 된 방은 아들이 다시 돌아오는 통에 다시 내주게 돼버렸다. 본인에게 딱 맞는 매트리스를 구매해 잠을 자게 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엄마에게 이런 일이 얼마나 빈번했을까. 그제야 엄마가 하는 거짓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갖고 싶은 것이 없다고 손사래 치던 모습도, ‘너는 참 돈도 많다’라며 나무람 속에 숨겨둔 부러움을.
결국 내가 본 엄마의 자아란 단단한 벽돌 성이 아닌 썰물에 깎여 나간 모래성의 흔적이었다.
나에게 엄마는 그렇게 든든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내가 엄마 나이를 따라잡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 성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럴듯한 성으로 보였던 것은 파도에 쓸려 나가도 몇 번이고 보충하고 또 무너지지 않기 위해 두텁게 다져 놓은 처절함이었다. 모래를 벽돌처럼 단단하게 보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존감과 자존심이 짓밟혔는지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다.
원래의 성은 얼마나 고유하고 아름다웠을까. 나는 엄마의 어떤 부분을 앗아갔을까.
엄마가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가성비 좋은 물건을 고르는 법을 더디게 깨달았을지도, 매장 매니저에게 ‘현금으로 줄 테니 몇 프로나 빼줄 수 있냐’며 흥정하는 방법도 몰랐을지도 모른다. 내가 산 물건 가격에 거짓말로 답하지 않아도 됐을 수도 있다. 생신이나 어버이날 선물을 드리기 위해 엄마 말에 숨겨진 뜻을 찾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모래성에 다시 살을 붙이고 더 이상 깎이지 않게 파도를 막기 위한 방파제를 쌓으려면 얼마나 들까? 모래성이 괜찮다는 거짓말을 더는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빨리 많이 벌고 싶을 뿐이다.
얼마면 될까?
by. 기차 연필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