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들의 다리는 왜 속절없이 노출 되어야만 했을까. 왜 입고 싶지도 않은 치마를 강제로 입음으로 나의 치부를 이 세상에 드러내야만 했을까. 나는 알타리 무 두 개라고 불리는 종아리 두 짝을 가지고 있었기에 늘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영문도 모른채 휘 드러난 하얀 알타리 무 두 개는 주인의 괴로움을 따라 그 역시도 어디로 가야할지도 몰라 보였다. 중학교 시절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는 길고 쭉 뻗은 다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어떤 양말을 신든, 어떤 두께의 스타킹을 신든 그저 멋스럽기만 했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그나마 최신 유행 아이템으로 등장한 발목양말이 약간이나마 숨통을 트이게 해준 수단이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신으면 종아리 밖에 보이지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발목양말이든 그냥 양말이든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랴. 이러나 저러나 알타리들은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6년간 알 수 없는 수치의 시간을 보낸 뒤, 스무살이 되자 꾸미고 싶은 욕심에 짧은 치마를 입어도 보고 짧은 바지도 입어보며 공작새처럼 나를 부풀렸다. 하지만 예쁘다는 말 대신 돌아오는 말들은 ‘생각보다 하체가 있네?’, ‘상체는 말랐는데 다리가 두꺼운걸 보니 하비구나!’ 등의 평가, 평가, 또 평가들 뿐이었다. 중학생 시절 상상하던 스무살의 내 모습은 이게 아닌데, 상상 속 대학생이 된 내 모습은 가는 종아리에, 얄쌍한 허벅지를 하고 짧은 치마를 잘도 입고 다니는 모습이었건만 달라진게 없었다. 심지어 그 당시 소녀시대가 스키니진이라는 세상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아이템을 유행시키는 바람에 내가 버틸 자리가 더욱 부족한 상황이었다. 스키니진이라니 무슨 저런 근본없는 바지가 유행일 수 있단 말인가. 치마를 좋아했지만 어울리지 않는단 생각에 우울한 마음이 꽤 컸던 시간이었다. 스키니진을 입을 바에야 차라리 치마를 입고 무다리를 드러내는 선택을 하는게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은 스키니진이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기도와 함께 대학 내내 내 마음속에 있었다.
나이를 먹으며 어느정도 내 스타일에 대한 확고와 약간의 자신감이 생기자 여러 대안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취업까지 하며 금전적 여유가 생기니 쇼핑의 범주도 넓어지기 시작했다. 취향을 따르고 컴플렉스를 가릴 요량으로 어느 순간부터는 롱치마 원피스를 줄곧 입고 다녔다. 원피스는 적당히 하체를 가려주고 적당히 몸매를 보정해주는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게다가 아침에 코디 하느라 지각할 일도 없었다. 그러다 더 시간이 흐르자 나의 기도가 드디어 먹힌건지 와이드 팬츠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와이드 팬츠의 유행에 나는 얼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허벅지를 꼭꼭 감출 수만 있다면 돌아온 푸대자루바지도 만사 오케이리라.
그러다 우연히 여자축구를 시작하며 본의 아니게 다시 짧은 바지를 만나게 되었다. 반바지는 여름에 집에서 잠옷으로 입던게 전부였는데, 이걸 입고 365일을 돌아다니라니요. 유니폼을 받들곤 낯설고 머쓱한 마음에 이렇게 입는게 맞나 싶어 거울 앞을 서성이곤 했다. 축구용 반바지는 바지 안감에 팬티 같이 생긴 속바지도 달려있어 낯설음이 극에 다했다. 이렇게 추켜 입는게 맞는건지, 혹은 더 내려입어야 하는건지, 바지가 너무 짧은 것 같은데 이러다 넘어지면 팬티라도 보이는건 아닐지, 안에 속바지를 한 겹 더 입어야 하는건 아닌가? (실제로 태클팬츠라고 바지 안에 입는 속바지가 있긴 하다) 하는 여러가지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결국 이런저런 고민 끝에 첫 훈련 날, 평범한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등장한다.
축구장에 가니 허벅지가 남산만하고 종아리가 한강 둘레만한 친구들이 무척 많았다. 아니 이런 세계가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다리를 부끄러워 하지않고 바지를 팬티처럼 말아올린 뒤 서로의 허벅지 두께를 비교하기도 했다. 심지어 나는 그 안에서 꼬챙이로 지목되며 가늘고 얇은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근 10년간 이쪽 세계에서는 없었던 대우인데 갑자기 젓가락 다리 취급을 받으니 좋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들은 어떤 양말이 더 다리를 가늘게 보여줄까, 어떻게 서야 다리가 안 뚱뚱하게 보일까 하는 고민이 전혀 없었다. 황소만한 다리로 잔디를 종횡무진하는 그녀들 사이에서 나는 허벅지와 종아리에 대한 미련을 버려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버려야만 했다. 허벅지를 키우고 종아리를 단단하게 만들어야 축구를 잘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뒤늦게나마 러브마이하체를 깨닫게 된 나는 하체운동에 매진하게 됐다. 갈라지는 허벅지 근육과 종아리 근육이 날 하비에서 하근으로 만들어 줄거야! 라는 생각에 황희찬을 롤 모델삼기로 했다. 헬스 트레이너에게 황희찬 허벅지를 요구하자 많이 당황스러워 하시긴 했지만 덕분에 피티 때마다 하체운동을 빼먹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다. 트레이너 선생님과 축구팀원들의 조언을 벗삼아 갑작스레 길어진 출퇴근 길에도 틈틈이 운동을 하기로 했다. 몰래 몰래 힙운동을 한다거나, 계단의 문턱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고, 가능하다면 한 두 정거장 정도는 먼저 내려서 빨리 걷기(폐활량에 좋단다)를 한다는 등의 일상에서의 운동을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난 달까지만해도 지옥같이 여겼던 3호선의 우울에서 어느정도 벗어나기도 했으니 말이다.
요즘 출/퇴근길에 가장 즐겨 보는 컨텐츠는 하체운동 루틴과 전 세계 축구인들의 훈련법 영상이다. SNS 알고리즘이 나를 아주 쉽게 파악해 ‘축구’만 반복해서 띄워준 덕분에 유투브든 인스타그램이든 검색창을 헤맬 필요가 없다. 쌍둥이 자매가 등장해 ‘자, 이제 애플힙 운동 해볼께용!’ 같은거 말고, 웬 영국여자들이 떼로 나와서 착착착 타이어 사이를 뛰어 다닌다거나, 엄청 빨리 패스를 주고 받는 축구 훈련 영상이 주로 나의 귀감이 된다. 이번주 출근메이트는 생전 가본 적도 없는 오리건주에 위치한 축구 트레이닝 센터의 훈련 릴스였다.
축구를 하며 내 신체의 사랑스러움을 깨닫고 나니 일상에서도 반바지를 부끄럽지 않게 입게 됐다. 다리가 좀 두꺼워도 이건 살이 아니라 근육이지! 라는 자부심에 살이 노출되어도 전처럼 수치스럽거나 번뇌에 빠지지 않게 됐다. 오히려 여름 땡볕에서 하도 축구한 탓에 허벅지에 탄 자국이 생기는게 더 멋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 허벅지들아, 너희는 지난 여름 바깥에 너무 안 나가서 하얗기만 하구나. 올 여름엔 팔뚝과 허벅지에 줄 네 개를 만들어줄게. 감수성 어린 여중생 시절에도 근육의 멋과 맛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차라리 더 일찍 축구에 빠져 그때부터 축구를 했다면 이렇게 출퇴근길에 반성과 부러움의 눈물을 흘리며 축구 영상을 보지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하비라고 놀리고, 치마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 사람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오늘도 피티 시간에 하체 운동을 하며 여행지에서 축구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봤다. 마음이 무척 설렌다. 내일 출근길엔 바르셀로나 축구 원데이 클래스를 알아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