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하는 구린내에 질식할 것 같은 요즘이다. 구린내의 원흉은 바로 나 자신이다. 사람은 35살이 넘으면 구려진다는데… 외면하고 회피하려고 해도 구리고 후져진 모습을 감출 길이 없다.
뭐가 그리 구리냐면...
부정적인 사람이 됐다. 아주 지독하게. 고인물 집단(a.k.a회사)에서 그렇게 젊은이를 환대하고 좋아하는 까닭은 젊음의 생그러움, 보고만 있어도 산뜻해지는 인간 청정기 같아서도 있겠지만 비단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세상 풍파에 아직 깎이지 않은 자신감과 정의감, 선함. 미래에 대한 긍정이 있기 때문.
긍정이 사라졌다.
대책 없이 맑고 밝았던 시기가 있었다. 사람이든 정책이든 미래든 과거든 좋은 면만이 더 크게 보이던 시절. 그랬던 마음이 어디서 다 긁혔는지 강박적으로 좋은 생각만 하려던 과도기를 지나 이제는 매사 부정적. 안될 것, 단점들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참 혼자 생각하면 될 것을 기어코 입 밖으로 꺼낸다는 것이다. 친구와 잘 대화하다가도 분명 그 주제가 친구의 관심사인 걸 뻔히 아는데도 '연필 읽을 바엔 소설책을 읽는 게 낫지 않아?'하는 식이다. 백날 집에 와서 '그 말 하지 말 걸' 하면 뭐하나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을.
돈에 돌아버린 사람이 됐다.
모든 것을 돈의 흐름으로 보는 것이 별로라며 주식이니 코인이니 하지 않는다고 심지어 그걸 열을 내 말하는 사람들은 참 별로라고 했던 게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년도 전에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그 유별난 짓을, 가까이 안 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분류한 짓을 내가 침을 튀기며 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 돈돈돈 거리는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뱉은 말을 지키지 못했다는 패배감과 과거의 오만함에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럽다.
투자에 관한 생각이야 뭐 시야의 확장이라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제일 싫은 점은 엄청나게 계산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설프게 주머니가 부풀면서 시간만 있고 돈은 없던 어렸을 때와는 달리 좋아하는 것에 돈을 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중에서 제일 좋았던 건 주변인들에게 작은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생일이라서, 그냥 생각나서 여러 이유로 마음을 전했다. 주는 것보다 되돌아오는 것이 많아 더 잘해야지 하고 벅차졌다. 그러다 여러 인연을 지나쳐가고 모든 것이 시절 인연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에서 자꾸만 계산기를 누른다. 진심으로 축하하며 건넨 축의금이고 무엇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받은 이들 중에 지속적으로 연락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짐승도 학습이라는 걸 하는데 사람인 내가 반복되는 현상 앞에서 멈칫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언젠가 어떤 때에 받을 수 있고 또 당시 아끼는 사람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에 자꾸만 치사해지는 내가 싫다.
사실 돈도 돈이지만 누군가에게 주는 마음을 자꾸만 덜어내는 것도 너무 실망스럽다. 어렸을 적 그렇게 비웃었던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이 시가 왜 스테디로 사랑받는지 깨닫는 요즘이다. 제일 강한 사람은 상처를 보며 과거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그게 내 추구민데 나는 상처를 보다 못해 혼자 후벼 파고 있으니 정말 볼품없다.
연필이 생기기 전, 독서 모임과 에세이 쓰기를 같이했던 모임에서는 내 안에 끄집어낼 말들도 많았지만, 멤버들의 글을 읽고 단어 하나하나 고심해서 읽고 피드백을 줬었다. 아날로그 세대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하나 프린트해서 파란 펜으로 오타와 문법을 정정해 주고 구절마다 느낀 점을 첨삭했다. 마음에 와닿아 구구절절 필자를 앞에 두고 특히 어떤 문장이 좋았는지 이 글로 얼마나 마음이 벅차올랐는지만 얘기하고 싶었던 글도 있었고, 내가 다듬어 주기보다는 조금만 글을 더 써보면 금방 반짝일 원석 같은 글도 있었지만 제일 힘들었던 것은 뭘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던 글이다. ‘네 그러시군요.’로 끝날 글. 이 모임이 아니면 한 문단 읽고 넘겨버릴 그런 글.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좁은 방에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누구는 빽빽하게 써주고 누구는 여백의 미를 뽐내는 종이를 건네줄 수 없었기에 참기름 짜는 것보다 더 힘껏 쥐어짜네 겨우 완성해서 모임에 갔던 시절이 있다.
피드백을 쥐어짜 내야 하는 상황에서 제일 많이 적었던 말은 ‘XX님이 조금 더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 좋겠다’였다.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것처럼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맛깔나게 춤을 추는 사람이 드물 듯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문장을 쓰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하지만 제일 강력한 사람은 지치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이다. ‘하기만’해서는 안된다. 책상 앞에 아무리 오래 앉아 있는다고 성적이 오르지 않으니까.
타인의 글을 보다 보니 내 글을 점점 볼품없어 보이고 내가 뭐라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까 자괴감이 많이 왔다. 감상평을 쥐어짜야 하는 글을 보며 알량한 자존심을 채우면서도 잘 쓴 글들을 보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빙글빙글 돌려 말했지만-
끝나는 마당에 그렇게도 강조했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생긴 것도 냄새도 모두 퀴퀴하고 추한 진짜 마음을. 그래서 이 글은 그런가 읽는 사람을 배려한답시고 힘 빠지는 내용에 억지로 희망찬 마무리를 짓고 싶지도 않다.
창작 욕구가 사라진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잘 쓰든 못 쓰든 맹목적이었던 시절은 이미 지나쳐왔는데, 해가 갈수록 달라지는 일상에서 글을 쓰고 남의 글을 읽고 합평하는 일은 습관도 못되고 얼룩진 자국이 되었음을 이제야 본다.
연필을 끝내버리면 그 마음을 인정하는 꼴일까 봐 여태껏 끌어왔는데 그렇다고 계속 유지하자니 좋았던 시절마저 괴로워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네 그러시군요' 하고 말 글에 데이터를 낭비하는 것 같아 이 일정을 덮는다.
10년 전, 10대 때 내가 꿈꾸던 20대였나? 돌아간다면 돌아갈 것인가? 생각했을 때 지금 돌아가도 그때처럼 똑같이 살 것이고 10대의 내가 치열하게 살아준 덕분에 만족해했다. 꿈꾸던 20대인가 하면 그때와 같은 결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20대의 나에게 나는 떳떳한가? 40대의 내가 먹고살 만한 피와 살을 채우고 있는가? 어딘가 현실에 붙어있지도 못하고 어중간하게 붕 뜬 상태로 현실에 매여 현실을 살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취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헤집고 다니는 나. 계속해서 외면했던 나의 추악한 모습을 마주한다. 이후에 나는 어떻게 될까? 특별히 달라질 것 같진 않다.
평생이 이런 식이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초반에는 활활 불타올라 의욕적으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자 하지만 막상 벌인 일의 어떤 시점을 지나면 큰 반응이 없어 의욕이 사라진다. 의욕이 사라지면 당연히 질이 떨어지니 더 반응이 없고 그러면 두 번 다시 쳐다보기도 싫은 애물단지가 되어버린다. 그래도 연필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연필들이 있어 여태껏 할 수 있었다.
3년
53편
이렇게 구린 인간이 벌인 일을 저 숫자만큼 같이 해준 연필 멤버들이 정말 고맙고 또 고맙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취객처럼 말해도 모자란 말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뉴스레터를 열어봐 준 필통들에도 고맙다. 읽지 않고 쓰레기통에 간 편들도 있겠지만 연필 구독자 대다수가 지인이기에 읽지 못하면 입에 걸린 음식물처럼 찝찝하게 걸려있었을 것이다. 친구라는 이유로 혹은 작은 호의로라도 당신의 시간을 나누어주어 정말 고맙다.
모든 것이 휘발되더라도 내 안에 남은 얼룩은 지울 수 없음을 안다. 나는 계속해서 읽고 어떻게든 무엇인가 만들어낼 것이다. 숫자보다 중요한 사람이 남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