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만큼 깨끗한 등기부등본과 토지대장이 있을까? 폐허가 되었던 서울 땅에 정부 수립 후 이때까지 이 땅의 주인이라곤 두 명밖에 없었다. 한 명은 우리 할아버지고 한 명은 우리 아빠다. 천호동인 지금의 집은 아빠가 고등학생 때 원래 살았던 돌마리(송파구 석촌동)집은 동네 재건으로 인해 임시로 할아버지와 식구들이 살았던 곳이다. 임시라기엔 꽤 오래 살았는데, 아빠가 학업도 마치고 결혼도 해서 엄마의 시댁이자 내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난 나의 '큰집'이 되었다. 할아버지와 큰아빠의 식구들이 원래 집인 돌마리로 돌아가고 엄마·아빠의 신혼집이 안양이었던 시절에는 잠깐 타인에게 세를 뒀다가 어찌저찌 그 집을 꿰찬 작은아들이 그 주인을 꿰찼다. 남들은 눈덩이 굴리듯 부동산 자산을 늘린다던데 우리 아빠는 이 터가 그렇게 좋았는지 늘리지도, 줄이지도 않고 그대로 보존해 오고 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나 역시 엄마아빠가 낳아주고 길러준 둥지를 떠나지 않는 신세다. (생활비는 드리는 유료캥*이다)
그러니까 나도 강동x송파에 대해 어느 정도 라떼 이야기를 덧댈만한 사람은 된다는 것이다. 잠실은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섬이라 심하게 비가 온 다음엔 나룻배를 타고 가야 하는데- 피 끓는 청춘들은 수영 쳐서 나갔다는 아빠의 말이 과장된 무용담임을 판별해 주는 할머니가 있다는- 아무튼 나와 내 가족이 이 동네 산증인이라는 것이다.
진짜 서울은 아무래도 사대문 안이고.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시 송파구로 송파구에서 또 강동구로 나뉘기까지. 그 시절 공무원들이 수기로 적은 것부터 전자 문서가 되기까지의 세월이 내 DNA에 녹아있다면 비약일까?
서울 변두리, 뽕밭과 과수원 농부가 대다수였던 이 작은 동네가 올림픽을 한다고 다 밀어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맨땅 위에 칸을 그리고 안방이니 변소니 하며 분양 공모를 했었던 이 작은 동네 이야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고 이미 자아가 생긴 이래 서울의 노른자 땅이 잠실이네 마네 하는 것은 만연한 사실이었어도 나와 내 뿌리가 살았고 살아왔던 곳이어도 여전히 서울은 사대문 안이고 이 동네는 부동산 놀음에 놀아나는 곳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서울로 이사 온 후에도 한동안 지하철은 나의 생활권에서 먼, 멀리 나가야만 탈 수 있는 교통수단이었다. 20세기의 끄트머리에서야 8호선 종점이 된 암사역이 생겼다. 그 후로도 한동안 암사-천호역은 6량밖에 없는 아담한 열차에서도 석촌역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가기 위해 탄 나 혹은 내 동생 둘 밖에 안타는 공기 수송선이었다. '진짜' 서울로 가기 위해선 5호선으로 갈아타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라 환승은 당연했고 지하철도 5호선이나 복잡했지 8호선은 늘 한가했고 무슨 역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다수였던 시절이 있었다.
경기도에 있는 고등학교로 매일 등하교 하던 시절엔 시외버스를 타고 복정이나 문정역에 내려 한가한 8호선을 타고 귀가했었다. 서울 안에서만 적용되었던 환승 제도가 경기 버스까지 확장되어 통학비를 줄일 수 있었던 건 졸업을 얼마 안 남긴 3학년 때였다. 지금의 서울 마천루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롯데타워 자리는 오랫동안 포장마차 자리여서 어른이 되면 꼭 가보려 했지만, 막상 성인이 된 후엔 본격적으로 롯데타워 착공이 시작 되어 가질 못했다.
대학 졸업 후 무조건 집에서 가까운 곳에만 이력서를 넣었더니 엎어지면 코 닿는 잠실에 있는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잠실역이 아무리 복잡하다 한들 2호선 얘기였지 8호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근속연수가 찰수록 8호선도 9호선 후배가 생겼다, 짬이 찰 만큼 찼다는 것을 과시하듯 사람이 많아졌다.
그렇게 한가했던 문정 복정동은 법조 타운이 형성되어 8호선엔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었고 코로나 때 잠깐 주춤거렸던 잠실도 이제는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그냥 언제고 사람이 넘치다 못해 터질 것같이 많은 동네가 되었다.
하지만 암사역은 늘 종점이었고 혹여나 딴짓하거나 졸아도 차고지에서 숨 가쁘게 청소를 끝마치는 미화원분들과 같이 다시 모란행 플랫폼으로 돌아 나와 내려면 됐었다.
공기 수송선이 뭐야 그런 게 언제 존재했냐는 듯 암사역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무조건 앉아서 갈 수 있었던 확률은 점점 줄어들었다. 당연한 것이 아닌데, 처음으로 출근길에 서서 갔던 날이 생생하다.
그러다 한 정거장도 아니고 아예 경기 의정부에 있는 별내까지 6정거장이 한꺼번에 연장되었고 요일, 시간대 상관없이 코딱지만 한 여섯 칸짜리 8호선은 늘 사람이 꽉 차서 다니는 노선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그 여유로움이, 서울 끄트머리, 그린벨트로 엮여 있어 한갓지고 가짜 서울이라며 놀릴 수 있었던 한가함이 그립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이 동네에 계속 머물렀을 뿐인데. 떠나온 적도 없는데 이전과는 너무 다른 동네에서 다른 생활권으로 살게 되었다. 부동산 가격이 비싸지고 말고는 다른 세상 얘기일 뿐이다.
울분에 차 적다 보니 사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가한 동네가 그립기도 하지만 사실 내가 진짜 그리워했던 건 따로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두 계시던 시절, 엄마 아빠가 젊어 어떤 일이든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절대적 믿음이 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시간이 많이 흘러 한국 인구수가 감소하고 서울에도 절대적인 인구수가 줄게 된다 해도 영원히 그 시절을 그리워할 것이다. 반딱거리던 8호선 새 열차의 모습을, 지금의 나보다 더 젊어 야무지게 아이 둘을 기르던 그 시절의 부모님을.
*유료캥 : 부모님과 함께 사는 자녀를 캥거루족이라고 부름 이하 캥
로열,캥수저-금수저캥
블루투스캥-따로 나가서 살지만 부모 지원 받는캥
유료캥-생활비 내는캥
무료캥-생활비 안내는캥
학캥/직캥-학생/직장인
리버스캥-본인 명의의 집에 부모 모시는경우, 이 경우 부모를 지칭하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