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이 어슴프레 지나고 더위가 한차례 꺾이길 기대했지만 처서까지는 태양의 기세가 완강할 모양이다. 오늘은 한 여름의 중턱인 8월 16일. 아직도 여름이 한 달정도 남았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바짝 곤두선다.
오늘은 연차를 쓰고 몸보신을 할 요량이다. 내친 김에 식당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한 낮의 더위가 35도를 임박하지만 이미 걷고 싶어진 충동은 막을 수 없기에 나는 축구 클래스에서 나눠준 스포츠 타올과 생수통을 챙겨 집을 나섰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광화문 교보문고로 가는 여정은 대략 이러했다. 익사이팅하게 안산을 넘어, 독립문역에서 이름난 맛집인 ‘대성집’에서 여름 몸보신을 위한 도가니탕을 뿌셔주고, 광화문에 가서 아아를 한 잔 때린 다음 교보문고에서 책을 여유롭게 보는 것!
안산은 사실 산이라기 보단 내 기준 동산같은 느낌의 얄팍한 산인데, 안산 둘레길이라고 나즈막히 난 안산을 둘둘 돌며 이대 뒷길부터 홍제동까지 이어진 귀여운 걷기 코스가 하나 있다. 산길이라고 쓰긴 하지만 바닥을 데크로 시공해 걷기도 편하고 쉼터도 잘 조성되어있어 종종 이 길을 찾곤 했다. (이 글을 쓰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안산 둘레길이 아니라.. 안산 자락길이라는 사실이다!) 여하튼 오늘도 안산을 뺑뻉 돌아 독립문역까지 내려갔는데 아뿔싸, 대성집에 사람이 너무 많은게 아닌가!
대성집은 독립문역 앞에 오도카니 서있는 오래된 노포로 무려 미쉐린가이드에도 등재된 이름난 도가니탕 집이다. 회전율도 빠르고 여자 혼자 밥을 먹으러 가도 아무도 눈치주지 않으며, 친절하고 맛도 최고다! 하지만 이렇게 맛있는 집은 나만 좋아하는게 아니었으니.. 하필 도착한 시간이 12시라 대성집은 이미 문전성시였다. 아쉽게도 발길을 돌리며 노선을 제 2안으로 변경했다. 사직터널을 지나 경복궁역으로 가서 ‘토속촌 삼계탕’집을 간다. 이게 2안이다.
사직터널은 살짝 굽어져 있어 초반에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이내 터널만 빠져나오면 고즈넉한 사직단이 나를 맞이해주는 은근한 분위기의 터널이다. 터널 안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무서움을 이기는 척 노래도 불러봤다. (TMI:아이브의 아이엠) 토속촌까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날이 더워 땀이 축축하게 흘렀다. 이렇게 덥지만 삼계탕에 인삼주 한 잔만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토속촌에 도착하자, 아뿔싸 아뿔싸! 여기도 손님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 물러날 곳이 없다! 해서 그냥 기다리기로 한다. 토속촌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역대 대통령들도 왕래해 언제가도 줄을 서야하고 사람이 바글바글거리지만 그만큼 맛있고 든든하다는 장점에 종종 찾는 식당이다. 겨울에 가면 뜨끈뜨끈한 국물로 몸을 녹이고, 여름엔 또 여름대로 몸보신이 되니 언제가도 줄을 슬만한 맛이 있달까! 여하튼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는 집이라 부채질로 땀을 말리며 긴 줄에 가담했다.
뽀얀 삼계탕은 슬쩍 들깨 맛도 나는 것 같고 잣 맛도 나는 것 같은게 부드러운 살과 술술 넘어가게 맛있었다. 곁들임으로 나온 인삼주를 마시니 잠깐 핑- 도는 것 같았지만 이내 삼계탕으로 해장 하며 창과 방패처럼 빠르게 삼계탕을 격파했다. 삼계탕과의 전쟁이 마치고 재빠르게 아아로 목을 축이고 싶어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어차피 땀에 절은거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로 하고 ‘나무사이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아를 받아내 원샷을 때리는데.. 이럴 바엔 그냥 양 많은 메가커피나 마실걸 그랬나? 하고 잠깐 후회했다. 대충 아아를 조지고 광화문으로 걸어 내려가며 오늘 사야할 책들과 할인쿠폰이 뭐가 있지를 떠올리다 문득 저녁은 남대문에서 갈치조림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먹보는 아니었는데 오늘 왜 이러지.. 싶다가 친구에게 카톡을 보낸다. [저녁에 남대문 갈치골목 어때?] 나는 빠르게 책을 사고 남대문까지 걸어갈 요량으로 길을 검색해본다.
손풍기 바람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더위는 나를 속수무책으로 납작하게 만들지만 먹을 것들을 위한 여정은 꽤나 기운차게 만들어준다. 더 여름이 가기전에 남은 것들을 해치워야겠다. 다음 주엔 보쌈을 먹어보면 좋겠다.
by. 크레파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