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드린 적 있다.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가 쭈꾸미 낚시를 한다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영 떠나버린 직후였다. 갑작스러운 잠수 이별에 여러모로 난리를 피다 나를 달래기 위한 마지막의 마지막 조치였다.
분노와 슬픔을 지나온 다이어리 다음 장에 차분하고 순종적인 기도문을 적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첫 필체는 전혀 평화롭지 않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가다 보니 그건 미래의 배우자가 아닌 나에게 해주는 말 같아 글씨도 마음도 한 것 고요해졌다.
타인에게 쉽게 기대고, 바라면서 평가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그러는 나는? 어떤 내가 되길 바라고 있을까? 배우자를 위한 기도가 아닌 나를 위한 기도를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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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하는 말을 진심으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듣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반응을 하고 무조건적으로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조금 시간이 들더라도 충분히 생각하고 의견을 말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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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습관과 생각을 고치려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진 않사오나
남이 지적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게 하시고
그 지적을 알려줌에 감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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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혼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혼낼 일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 좋겠으나,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윗사람 역할을 할 적에 누군가를 혼낼 일이 생긴다면
감정에 치우친다던가 미안하거나 안쓰러운 마음에
얼버무려 상대의 발전을 늦추게 하는 일이 없게
정확하고 효율적인 피드백을 줄 수 사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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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찰나의 영광에 갇혀 매몰되지 않게하시고
생긴 상처만 들여다보다 덧나지 않도록 빨리 아물게 하시어
생긴 흉터를 교훈삼아 현재를 충실히 미래로 나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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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벌고 잘 쓰는 사람이게 하소서.
젊음을 무기 삼아 돈을 벌 수 있는 시기는 생각보다 짧사오니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귀하게 여길 줄 알게 하시고
불로소득의 기회도 호시탐탐 (물론 합법적인 것만) 노려
알뜰살뜰 토끼 같은 저를 잘 먹여 살리도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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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이에게 약하고 강한 이에게 강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나 불우한 이웃에게 주저 없이 손 내밀게 도와주시고
불의와 부당한 일에 맞서 행동하도록 두려움을 거둬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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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신체에 기뻐하고 잘 사용하게 해주소서.
피가 도는 뼈와 살의 경이로움을 위해
활동적으로 어느 정도 이상의 전문성 있는 생활 운동가로 활동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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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을 쓴다고 오랜만에 옛 일기를 다시 읽어보았다.
참 별난 걸로 기도를 했네 비웃었다가 덕분에 좋은 인연을 만나지 않았나 마음을 바꿔 먹었다.
종교를 떠나 기도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신성한 무엇임을 믿기에.
이 기도문이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를 지켜줄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