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매직 느끼셨나요?
이제 선풍기를 밤새 틀지 않아도 잘 수 있는 걸 보니
여름도 가고 있기는 한가 봅니다.
높아지는 하늘을 보니 사색을 즐기기 좋은 계절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또 다른 연필들의 모습에서 여러분의 모습을 찾아보며 여러분도 생각에 잠겨보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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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들
우리에게 정확한 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다 빠져나가버린 썰물처럼 나를 채우던 이들은 어느덧 멀어져 있었다.
앞니가 톡 하고 튀어나온 선예는 양 갈래 땋은 머리를 하고 다녔다. 다람쥐같이 귀여운 그 아이가 좋아 계속 주변을 알짱거렸다. 같은 반이지만 선택과목이 달라 일정 시간 동안 떨어져야 했고 딱히 공통점도 없었지만 선예 옆자리 꿰기엔 꽤나 진심이었다. 방과 후 학습이 필수가 되자 동아줄같이 내려온 기회를 낚아 같은 항목을 신청하고 옆자리에 꼭 붙어 앉았다. 집에 돌아갈 때면 돌고 돌아가는 노선이었지만 그 몇십분마저 붙어 있고 싶어 선예가 타는 버스를 탔다.
돌아보면 나는 늘 선예가 좋다고 달라붙어 있는데 선예는 난감한 표정이었나 그 와중에 반겼었나.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졸업과 동시에 당연한 수순이었다는 듯 연락이 끊겼다.
아영을 뺀다면 고교 시절 절반 이상을 도려내야 한다. 아니 어쩌면 통째로 없어질지도 모른다. 단순히 시간을 같이 많이 보낸 것을 넘어 서로를 아꼈다.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도 그랬다. 진학을 했을 때도, 해외에 나갔을 때에도, 첫 직장에 들어가서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마음을 기울였다.
그랬던 우리도 과거가 되어 버렸다. 잊고 지내다가도 아영은 툭 하고 튀어나온다. 방 정리를 할 때면 꼭 한두 개씩 주고받은 편지나 쪽지가 나온다. 또박한 글씨로 우리가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이 적혀 있다. 그 마음이 기껍고 아득해 옛 추억을 더듬거리다 방 정리는 흐지부지돼 버리고 만다. 꼭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겠는 우리의 마지막처럼.
무슨 일을 하는지 빛이 나게 설명하던 유진 씨는 좋아하는 취미를 말할 때 더 반짝였다. 뛰어난 감각에 자신감이 넘치는 유진 씨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맘에 드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법이 뭐였는지 친구를 처음 사귀어 보는 것도 아닌데, 유진 씨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많은 마음을 먹어야 했다. 걱정과는 다르게 빠르게 답장이 왔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시간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건만. 타이밍의 문제였는지 곁을 내어주는 것의 한계였는지 연락은 뜸해졌다. 눈치 없게 연락을 계속 해 볼 수도 있지만 사회에서 만난 사이라면 의례 그래야 하듯 정중하게 상대의 뜻을 받아들였다.
시절 인연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나를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니저러니 내 삶을 쥐고 흔들려고 했던 ‘남자 친구’와의 이별은 아쉬워도 해방에 가까웠건만. 이렇게 이야기가 많은데 당연했던 것들이 왜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 건지. 애초에 같았던 적은 있었을까? 서로를 버티고 있었던 건 아닌지. 시절마다 나를 잡아 세운 기둥이었을 마음과 관계들이 어느 틈에 무너졌는지. 친구를 잃음에 나를 구성하는 세계가 늘 한결같을 수 없음에 자주 허물어지곤 했다.
하지만 마냥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슬퍼했던 것도 어느새 과거가 되었다. 너무 많은 그리움과 걱정을 달고 살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아무리 변한 우리가 슬퍼도 과거임을 받아들일 때 나는 또 다른 나로 업데이트된다.
여전히 나는 친구들을 잃게 될까 두렵다. 흐름대로 맡기라지만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실수로 내가 제일 아끼는 것들을 잃게 될까 봐 무섭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해서 막을 수도 미룰수도 없음을 이제는 안다. 어쩌면 진이 빠지도록 너무 노력한 탓에 '관계 유지 에너지'가 소진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탓하지 않고 그저 괜찮은 길인지 돌아보기만 하면 되는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나와 닮을 순 있어도 절대 내 얼굴일 수 없다. 닮고 싶은 얼굴이어야만 견디고 견뎌주는 것임을 이제는 알기에.
언젠가 우리가 서로를 잃어버리더라도 서로에게 묻힌 얼굴이 나쁘지만은 않기를 바라며.
By. 기차 연필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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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르는, 엄마
0세들의 새싹반 선생님이 된 이후 아가들에게서 듣는 말은 '엄마'가 전부다. 좋아하는 사람을 부를 때, 기분이 좋을 때, 슬플 때, 다쳤을 때, 하기 싫을 때, 어렵지만 해냈을 때도 다 “엄마”라는 말 하나면 표현이 된다. 어조에 변화를 주는 아가들도 신기하지만 이를 듣는 사람들도 그 목적 맞게 공감을 하고 반응을 하게 된다는 게 정말 놀라운 일이다. 단어 자체가 모두에게 내려앉는 의미가 있기에 그렇지 않을까?
새싹반 아가들이 모든 의사를 “엄마, 엄마”로 해결하는 것처럼 나도 “엄마”로 첫 말을 떼었을 텐데, 어릴 때 엄마를 부르는 내 모습이 기억에 없다. 내성적인 타입이기도 했지만 엄마가 뭐하는 지 궁금하면 가서 보면 되고, 필요할 때도 직접 상황을 살피면 되는 거지 특별히 명칭까지 부르지 않아도 되었다. 어린 나이에는 루틴으로 하는 게 대부분이라 부탁할 것도 물어볼 것도 많지 않았다 쳐도 나이 들어 말이 많아진 지금까지도 사실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며 찾을 일은 별로 없다. 이유가 궁금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누군가를 부르는 목적은 나를 보며 인식하게 하고, 이름 뒤에 올 말을 들어 달라는 것이기 때문인 듯하다.
같은 집에서 가정주부인 엄마와 오래 살아온 나는, 특별히 엄마를 부르지 않아도 그냥 엄마가 내 옆에 있다는 걸 알았고 엄마도 그러했듯이 우리가 서로의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따로 부를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엄마를 부르지 않은 건 부르기도 전에 언제나 곁에 있어서, 이미 나를 봐주고 들어주고 있기 때문일 거다.
이 나이까지도 참 철이 없었다고 생각되는 게, 오랜 시간동안 엄마에 대한 기억 중 주축이 된 이미지가 아프셔서 누워 계시던 모습이었다는 거다. 사람이 다 다른 것처럼 엄마도 다 다를 테지만 어린 시절의 나에게 우리 엄마는 아픈 엄마였다. 먼 곳에 갈 수가 없어서 여행도 시골도 간 적 없긴 하나 대단하게 엄마는 늘 밥을 차려주셨다. 더 신기한 건 항상 내가 뭘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거다. 당시에는 너무 잘 아는 엄마가 무서워서 거짓말 금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내가 뭐 하는지 안다는 건 나보다 언제나 상위에서 지켜주고 있었다는 뜻과 같다. 엄마의 울타리 안에서 나는 씩씩하게 지낼 힘을 받고 가족을 향한 나름의 배려와 존중도 할 수 있었다.
30년이 넘게 엄마와 같이 사는 특권을 누리면서, 알아서 척척 받은 챙김이 너무도 많다는 걸 결혼한 뒤 느끼고 있다. 살면서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들 중 가장 큰 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걸 좀 더 인지하고 있기 때문인데, 나는 입체적인 존재이고 다중적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보는 거울로 보이지 않아 드러나지 않다가, 나답지 않은 사이드가 느껴질 때면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족한 면도 끊임없이 생겨난다. 그럼에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 덕분에 나의 모든 면들이 어우러지고 나다워지도록 자라갈 수 있었다.
부르지 않아도, 말이나 다른 무언가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저 같이 있는 것으로 나에 대해 알아주는 사람. 엄마란 그런 존재 같다. 함께 한 시간 자체도 길긴 하지만 그 긴 시간을 애정으로 꽉 채워줄 수 있는 사람. 그 애정의 시간은 티 나지 않게 빛이 나기에 함께 있을 때는 더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어느 곳에 있어도 나에게 힘이 된다. 소중하고 소중한 이름. 엄마의 진짜 이름도 하나 뿐이라 아름답지만 우리 엄마는 나만 엄마라고 부를 수 있으니까, 나도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도 한 명 뿐이니까. "엄마"라는 말이 너무 좋다. 좋은 건 많이 불러야하는 법! 많이 쓰고 듣고 말하는 게 좋으니, 그러니까 이제 자주 부를래요. 엄마!
고마워요. 엄마. 내가 엄마라고 부를 수 있어서,
그리고 언제나 나의 부름을 마주해줘서.
By. 동글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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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치는 세상 속에 내게 사소한 행복을 줘서
감히 말하건대 내 인생은 덕질 전과 후로 나뉜다. 그들을 알기 전에 나는 대체 무슨 노래를 들었으며, 무슨 영상을 소비했으며, 어디에 월급을 썼던가. 어쩌다가 30살이 훌쩍 넘어 20대 청년들을 흠모하게 되었을까. 그저 잠깐 지나가는 바람일 줄 알았다. 이전 직장 동료가 무심코 보여준 영상 한 번에 말로만 듣던 덕통사고를 당했다. 햇수로 4년 째. 이제는 인정하자. 사랑이구나.
좋아하는 오빠/언니들을 향해 풍선을 흔들고 브로마이드를 구하기 위해 음반 가게에 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덕질 문화가 나 빼놓고 그동안 성행 중이었다. (왜 안 알려줬어..!) 솔직히 말하자면 알려고 하지 않았다. 홍대 한복판에 있던 회사에 다닐 때 근처 카페에서는 사계절 내내 여러 아이돌을 위한 생일 카페가 있었다. '아니 얘네 누군데? 얘네가 뭔데 생일을 왜 이렇게 축하해줘? ' 가뜩이나 복잡한 홍대 거리인데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뤄서 오히려 눈을 흘겼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내가 그 군중 속 1인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이돌도 좋지만, 이들에게 더 빠질 수 있게 하는 힘은 팬덤이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같이 좋아하는 이들이 함께 모였을 때 느끼는 소속감은 어마어마하다. 현재 덕질 중인 아이돌이 워낙 피켓팅*이라 오프라인 콘서트나 팬 미팅은 꿈꾸지 못했다. 올해 처음으로 '아, 이 친구들 무대는 꼭 한번 봐야지 억울하지 않을 텐데'라는 마음이 들었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 올 만큼 밤새워 원하는 자리를 위해 취케팅*까지 과감히 도전했다. 올해 총 4번, 3D로 움직이는 아이돌을 보았다. (충격, 세븐틴 실존. 콘서트 못 봤다면 진짜 억울해서 죽어서도 구천을 헤맸을 것이다.) 최애 멤버가 달라도 같은 그룹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나이, 직업, 국적을 막론하고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오로지 그룹을 사랑하는 마음과 옆 자리에 앉아 같이 호들갑 떨 준비가 된 다른 팬을 위해 개인 경비를 들여 키링, 인형 제작부터 소소한 간식 키트까지 준비해 온다. '지금 저 멤버가 날 본 거겠지?' 하며 각자 착각 속에서 행복함을 느끼겠지만 그게 대수인가. 출퇴근할 때, 길을 지날 때 등 내가 좋아하는 그룹의 굿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인사를 건네고 싶다. 저도 캐럿이에요!
내게 세븐틴을 알려준 전 직장 동료들이 입 모아 현 X ,구 트위터를 설치하라고 했다. 십몇 년 전, 영 내 취향과 맞지 않아 삭제했던 그 앱을 다시 깔았다. 좋아하는 멤버를 검색해서 소위 말하는 네임드 계정을 팔로우하라고 했다. 홈마*라고 흔히 불리는 그들은 멤버들의 고화질 사진과 영상, 또는 재창작 된 콘텐츠를 무료로 제공한다. '좋아요'와 북마크로 열심히 소비한다. 이 익명의 공간은 피로감과 아하 모먼트를 동시에 준다.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성 팬으로써 여성 인권을 그들이, 혹은 엔터테인먼트사가 어떻게 무시하고 있는지 날카로운 비판 글이 자주 올라온다. 가끔은 여자 아이돌 역시 여성 인권 퇴행적인 행보를 보여 입에 오르락내리락한다. 억까*성 글도 종종 보이기 때문에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의아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미 아이돌 판에 한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누구 한 명이라도 의문을 품는 문제라면 다시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자본주의의 모든 병폐가 모인 듯한 요즘 아이돌 문화에 기꺼이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는 팬들을 위한 보호 장치는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우리를 호구로 아는 것 같다. 과거의 나는 대상과 관계 없이 무언가에 깊게 빠져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이해하지 못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에 투자하는 시간 가치를 함부로 재단했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대체 저만큼의 돈과 시간과 감정을 소비하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덕질을 시작하니 호구를 자청한다. 아니 자청할 수밖에 없다. 소속사 돈 벌어주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최애 포토 카드를 내 손에 쥐게 되었을 때, 한정판 그룹 굿즈를 가졌을 때 얻는 행복감은 앞선 생각을 모두 잊게 한다. 덕질하며 가장 현실 자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이때이기도 하다.
사주에는 이성 운이 있다. 그 시기에 연애하고 있지 않다면, 이성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도 연애로 본다고 친구한테 들었다. (나 역시도 37살에 결혼 운이 있다고 했는데, 혹시..?) 그렇다. 지금 내 나이대의 주요 관심사는 결혼, 연애, 육아, 이혼, 투자.. 등이 보편적일 것이며 인생의 대소사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것이다. 그 옆에 전혀 다른 관심사로 골머리를 앓는 내가 있다. 내 아이돌의 입대 소식에 눈물을 삼키고 콘서트 티켓팅 성공 여부에 따라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그들의 무대를 보며 벅찬 감정을 느낀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예전의 나처럼 '아니 지금 나이에 아이돌을 좋아해?', '아이돌 문화 이상한데?' 하면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걱정 마시라. 건강한 덕질은 일상생활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된다. 반복되는 일상에 숨 쉴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반질반질하게 잘 꾸며진 잘생긴 청년들과 유사 연애 감정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회사에서 또는 일상에서 느끼는 분노, 답답함, 무료함, 단조로움 등을 해소 시킬 수 있는 탈출구가 된다. 아무리 아이돌이 좋아도 그들이 내 삶보다 우선은 아니다. 그 정도 인지할 나이는 되었으니까 말이다. 한 가지 늘 마음으로 비는 것은 부디 사회 1면에 나오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 활동해 주기를 바랄 뿐!
(제목은 세븐틴의 <소용돌이>라는 노래 가사에서 발췌했습니다)
*피케팅 : 피가 튀는 전쟁 같은 티켓팅이라는 뜻
*취케팅 : 취소표+티켓팅을 의미하는 합성어. 결제 취소로 인해 생긴 빈 좌석을 잡는 티케팅
*홈마 : 홈페이지 마스터의 줄임말. DSLR을 들고 연예인을 촬영하는 팬인 '찍덕'이 홈페이지를 운영하게 되면 '홈마'라고 한다
*억까 : 억지로 비판한다는 뜻
By. 연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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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
나는 예쁘다는 말이 불편하다.
물론 이 말을 함으로써 이유를 알려주기도 전에 “열폭하네.”라는 말을 듣게 되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외적인 훌륭함을 따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말이 상대방(특히나 여자)과 사회에 주는 영향이 불편하다. 어쨌든 외모를 가꾸는 것을 노력의 영역으로만 본다면 많은 것을 자제하고 힘썼을 테니 손뼉 쳐주는 게 맞겠지만, 정말 그게 다일까? 많은 사람들이 외적인 강박을 가지는 누군가에게는 혀를 차면서도 인형 같은 외모, 마르고 늘씬한 몸매에 대한 찬양을 아끼지 않으며, 예쁘면 대우받아야만 한다고 한다. 연예인은 뼈가 보이도록 살을 빼야 리즈니, 고급스러워졌니 소리를 듣고, 그들을 동경하는 어린 친구들은 ‘개말라 인간’이라는 단어와 목표를 만들어 굶는 걸 자랑스럽게 전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분위기가 과열되다 보니 자꾸만 말도 안 되게 작아지는 옷 사이즈에 우리가 인간인지, 펫숍에서 분양하기 위해 굶어 키운 성장하지 못한 토이 푸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예쁘다.’ 분명 칭찬이지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사회적 기준으로 인해 생기는 강박 때문이다. 악플의 밤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설리 씨가 예쁘다는 칭찬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예쁘다는 말조차도 사실 평가이고, 그냥 발견한 사실에 대해서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불편해하는 것과 별개로 대부분은 분명 칭찬의 의도로 말했을 것이고, “예쁘다는 말이 불편하면 대체 어떻게 말하라는 거야?” 하며 어리둥절할 것이다. 동물도 인간도 미적으로 훌륭한 것에 먼저 끌리는 것이 본능이고, 좋은 것을 보면 표현해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나 또한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찾은 방법은 그저 애매모호한 ’예쁘다‘라는 말보단 ‘명확한 말’을 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맛있는 걸 먹을 때 심각해지는 네 표정이 재밌어”라던 지, “신나면 눈이 반짝이더라”와 같은, 설리 씨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발견한 상대방의 모습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했던 것만 돌이켜 봐도 누군가가 내 존재를 인지하고 관찰해 주는 것에 더 큰 특별함을 느끼지 않았던가. 다양한 말을 사용하면 섬세하고 예쁜 표현을 알 수 있고, 감정을 더 확실히 할 수 있다. 그리고 듣는 상대방도 더욱 근거 있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장점뿐인 칭찬 방법. 다들 한번 사용해 보시라!
By. 마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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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이 묻고, 필통이 답하다. (I am)
안녕하세요. 크레파스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번 시즌 [또 다른 나]에서는 저의 또 다른 자아라고 볼 수 있는 제 주변의 친구들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시작은 '친구 자랑 잔치'라는 계획이었지만요. 친구들을 인터뷰하고 이야기를 귀 기울여보니 저 혼자만 알기엔 아까운 이야기들이 참 많더라고요. 함께 나누면 더 즐거운 것들이 있잖아요. 그간은 저희의 이야기만 쭉 전했었지만 이번엔 지면을 빌려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친구들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고 계신가요? 일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어떤 마음으로 일을 하시나요? 여러분은 어디서 거주하고 계시나요. 거주하시는 곳에 대한 만족은 있나요? 진로를 바꾼 적 있나요? 꿈이 있으신가요? 그간 연필레터에서 종종 다뤘던 이야기들을 모아 친구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누군가를 인터뷰한다는 게 처음이라 부족한 시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인터뷰를 당한 사람과 한 사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께는 유의미한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요.
오늘은 서울에서 나고 자란 필통[제시카]와 일을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필통 [리틀포레스트]를 만나봤습니다. 왜 이런 분들을 모셨냐면요. 제가 바로 일을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저와 같은 선상에서 또 다른 저를 보여주는 친구와 저와는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또 하나의 저를 보여주는 서울친구 한 분을 모시게 되었답니다. 모두 서울에 있지만 제 각각 각자의 '업'을 위해 노력하는 두 친구의 이야기를 소중히 읽어주세요.
인터뷰에 대한 많은 의견들 담벼락에 꼭 남겨주세요.
저는 더 많은 이야기를 공손히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필통의 이야기]
1. 자기소개, 크레파스와의 관계를 말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 살고 있는 제시카입니다. 크레파스와는 독서모임에서 만나서 친구가 된 지 2년이 되었어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무르익을 만큼 익어가며 서로의 성장을 지켜봐 주고 있는 사이랍니다.
2. 지금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저는 지금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올해는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의 담임으로 일을 하고 있으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학부모와의 상담 학교의 여러 행정 업무, 개인적 역량 성장을 위한 연수 등 다양한 방면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2-1.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이 일의 보람은 아무래도 아이들의 성장을 눈으로 지켜볼 때인 것 같아요. 친구들 사이에서 적응이 어렵고, 선생님인 저와도 의사소통이 어려운 아이가 있었어요. 그 아이는 친구들을 너무 좋아하는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아이였어요. 그래서 제가 조금 더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면서 마음을 열고 다른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었죠. 그렇게 제가 노력한 부분에 있어서 빛을 발하는 순간, 아이가 스스로 다른 아이들과 긍정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기쁨을 느낄 때 너무나 큰 보람을 느껴요. 저와는 고작 1년을 함께하지만 이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 스스로 살아가야 할 때 행복을 자주 느끼는 아이 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 기반에는 정서적 의사소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러한 교육관을 가지고 가르치고 있는데, 어렵지만 작은 성장을 해내는 모습을 직접 보았을 때는 눈물 나게 고맙고 보람차답니다. 이렇게 큼지막한 일이 아니더라도 평소 수업하다가 잠시 아이와 눈을 맞추었는데 배시시 웃어줄 때, 저의 고갯짓을 따라 하며 서로 행복한 웃음을 까르르 뿜어낼 때. 삐뚤빼뚤한 글씨로 선생님께 사랑한다고 써서 보여줄 때 주로 보람을 느낍니다.
2-2. 하는 일에 대한 고충이 있다면요?
작년에 있었던 비극적인 일로 인하여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학부모 민원이 이 일의 가장 큰 어려움인 것 같아요. 아이의 성장을 원하는 것은 교사도 학부모도 모두 같은 마음인데 왜 이렇게 마음의 방향이 서로 달라질까요. 서로의 말을 오해하고 교사의 노력을 곡해하며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어려운 부분인 것 같아요.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실 때, 교사인 나와 결이 다르다는 이유로 교사를 일방적으로 부정할 때. 그럴 때가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3.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직장을 얻게 된 가장 큰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직장을 얻게 되면 주거 안정성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아요. 이미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에서 벗어나지 않고 직장을 다닐 수 있고, 직장을 다니기 위해 따로 거주할 곳을 알아본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자취를 하기 위한 여러 가지 것들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사회 초년생에게 큰 장점인 것 같습니다. 단점은 크게 느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때때로 내가 상대적으로 자립심이 부족하다거나 또 다른 사회적 경험치가 적다는 걸 느끼기도 하지만 엄청 큰 단점이 있다-라고는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4.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고민이 있거나, 바람이 있다면요?
저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있어요.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건강하게 아이를 출산할 수 있을까. 건강하게 아이를 출산하더라도 더 나은 환경에서 아이를 자라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워킹맘으로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두 가지를 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사회적인 분위기는 조금 더 팍팍해지는 것 같은데 이 사회에서 아이를 교육하려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입니다. 내가 출산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것이 아이를 위해 행복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특히 요즘과 같은 기후위기, 환경문제, 경제적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항상 이 고민을 하고 있답니다.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 행복한 일이 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5. 더 나은 우리 시대를 위해서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너무 주관적인 생각이 될 수 있겠지만 아이를 키우고 자라게 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단순히 출산 지원금, 허울뿐인 휴직제도가 아니라 한 여성이 엄마로 충분히 아이에게 애정을 줄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제도를 지원해 주거나, 사회 활동과 육아를 양립할 수 있는 회사 내부의 규정, 많은 것이 변화하였다고는 하지만 부부가 함께 키운다는 건강한 마인드 등. 한 여성이 개인으로 자신의 성장을 놓치지 않고도 아이를 충분히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있는 실직적인 제도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6. 제시카의 길을 따라오는 동생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이미 저보다 더 많은 것들을 잘 해내고 있을 것만 같지만, 자신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디선가에서는 직장인으로, 딸로, 또는 아내로 엄마로 지내고 있을 분들이기에 역할이 점차 늘어날수록 자신의 색이 옅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자신이라는 걸 잊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7. 제시카의 삶을 먼저 선행한 언니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수없이 많은 노력과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 덕분에 지금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의 삶을 먼저 선행한 언니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누리는 것들이 당연한 게 되지 않았겠죠. 서로가 함께 연대하며 더 나은 세상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데에 함께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저도 여기 있어요!
8. 마지막으로 제시카의 꿈은?
저의 꿈은 아주 소박합니다. 작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려 넘치게 사랑을 주고받는 아이와 도란도란 지내는 것. 사랑하는 누군가와(꼭 이성이 아니더라도요) 함께 산책하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각자의 마음을 잘 어우러만 져 주는 순간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행복들에 조금 더 예민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행복들에 조금 더 민감해지는 제가 될 수 있겠죠!
[지방에서 서울로 온 필통]
1. 자기소개, 크레파스와의 관계를 말해주세요.
필통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직장생활을 위해 20대를 서울에서 보내다 현재는 잠시 쉼을 위해 본가로 내려와 있는 닉네임 [리틀포레스트]입니다. 크레파스와는 친언니보다 더 자주 연락하는 사이로 중학교 때부터 우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방에서 자란 저희가 직장생활을 위해 서울에서 거주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더 가까이 자주 만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친구를 하게 된 지는 벌써 10년이 훨씬 넘은 것 같아요.
2. 지금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오랫동안 준비한 영양사 일을 시작한 지 4개월 조금 지났습니다. 아직은 정확히 이 직업에 대해 다 안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이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아요. '이 직업은 동네북이다.. ' 왜냐면 음식은 모두가 기준이 다르고 맛이 다 다르잖아요. 그래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주 사소한 것에도 말을 하기 때문이에요. 또 영양사가 의외로 하는 일이 정말 많더라고요. 주어진 업무 외에 일을 하다 보니 동네북처럼 스스로가 느껴질 때가 있는 것 같아요.
2-1.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제일 보람일 땐 구성한 식단을 조리사분들이 완벽하게 재현해 주셨을 때와 그리고 그걸 먹은 고객들이 맛있다고 칭찬할 때입니다! 아무래도 영양사다 보니 이런 부분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영양사가 되기 전 직업은 요리사였는데요. 영양사로 직업을 바꾸고 나니 요리를 직업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걱정이 생기곤 하더라고요. '이 음식들이 내가 계획한 맛대로 맛이 나올까?'라는 걱정이요. 그런데 이 음식을 완성해 주시는 조리사님들을 볼 때 협업의 즐거움도 느끼고 계획한 것에 대한 만족감도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2-2. 하는 일에 대한 고충이 있다면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현재로서는 요리사에서 영양사로 직업을 바꾸며, 이에 대한 적응과 새 직장에서의 적응, 그리고 음식에 대한 민원들이 가장 큰 고충인 것 같아요.
3. 지방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직장을 얻게 되어 서울살이를 하며 느낀 가장 큰 장점과 단점이 있을까요?
서울의 장점은 모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다고 하는 서울 내 외곽조차도 2시간에 버스가 한 대 있고, 막차가 9시에 끊기는 이곳보다는 나으니까요. 저는 이런 것들이 서울로 우리가 가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단점은 서울의 삶에서 여유로움이 없었던 저의 하루하루들이에요. 저는 서울에 살면서 늘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같이 출근하는 아무개는 지하철에서 영단어를 보는데 나는 노래를 듣고 있죠. 그냥 그런 모습이 나를 자극시키면서도 나를 지치게 했던 것 같아요. 성향이 다른데 나도 바쁘게 살아야 할 것 같았거든요. 때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서울의 인프라를 사랑하지만 시골에 최적화된 것 같아요.
4.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고민이 있거나, 바람이 있다면요?
부끄럽지만 저는 그냥 오늘 하루 그리고 내일, 매일매일 당장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바빴던 것 같아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왜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생각해 보니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느라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뉴스를 보아도 그때만 잠깐 안타깝다, 바꿔야 한다라고만 생각해보고 말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혹시 이렇게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걸까요?
5. 더 나은 우리 시대를 위해서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위와 같은 마음을 바꾸면 제가 더 움직이면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을까요?
6. 리틀포레스트의 길을 따라오는 동생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꾸준히 노력하지 않으면 머물 수밖에 없다.
7. 리틀포레스트의 삶을 먼저 선행한 언니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언니들 저 지금 다행인 걸까요?
8. 마지막으로 리틀포레스트에게 꿈이 있다면?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일에 큰 사고 없이 행복하기
By. 크레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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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쓰는 우리를 소개합니다 👭
기차 연필깎이🚂 정갈하고 뾰족하게 고장 없이 연필을 깎아주던 기차 연필깎이처럼 오래 쓸래요. 동글연필💫 아이들 사이를 동그르~ 굴러다니며, 함께하는 일상을 끼적여요. 마카🗒 슥슥- 연필의 유일한 그림쟁이입니다. 작은 네모칸에 제 생각을 담아 보여드릴게요. 연필심✏ 단단함과 무름을 모두 가진 연필심처럼 유연하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그렇게 살고 싶어요. 크레파스🖍 세상을 크레파스로 다채롭게 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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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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