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정해진 얼굴이 없습니다.
때로는 진심 어린 말 한마디, 때로는 모른 척 지나간 침묵, 누군가의 행동, 혹은 아주 오래전 기억 하나가 우리를 무너지지 않게 붙들고 있기도 하지요.
이번 뉴스레터엔 그런 다양한 위로의 얼굴들이 담겼습니다. 읽는 동안, 당신의 마음에도 조용히 닿는 문장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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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마음과 몸이 회색이 되었다 싶을 때 나는 집에 내려간다. 독립한 지 16년 차. 부모님과 같이 지내는 게 불편하고 어색해지는 장기 독립러가 됐다. 엄마의 살림과 나의 살림이 완전히 달라지고, 아빠의 생활방식과 나의 방식도 어느새 격차가 생겼다. 어느 곳을 집이라 부르는 게 좋을지, 진짜 우리집은 어디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내가 나로 있을 때 가장 나답다고 느끼지만 그럼에도 가족 품으로 돌아갈 때 나는 다시 내가 되곤 한다.
어렸을 적 가끔 일부러 거실에서 잠이 들었다. 소파 위에 누워 있으면 아빠가 '또 여기서 잠들었네.' 하며 날 공주님 안기로 방까지 바래다주곤 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차 안에서도, 거실 소파에서도 아빠의 허리는 생각도 안 하고 일부러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눈꺼풀을 사르르 떨며 몰래 눈을 뜨면 항상 아빠의 품이 보였는데 아빠의 향수 냄새와 숨냄새를 맡으며 안겨가는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기분 중 하나였다. 두둥실 떠 있는 기분도 기분이거니와 누군가 내 잠이 깰까 챙겨주며 포근히 안아준다는 게 더 좋았다.
그보다도 더 어렸을 때, 마트에 갈 때마다 갖고 싶었던 미미 인형 화장대가 있었다. 엄마와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사달라고 징징댔는데, 당연히 안돼-라는 말이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 아빠 손에 그 화장대가 들려있었다. 현관문 틈으로 아빠의 발보다 더 먼저 집으로 들어온 미미 화장대. 온통 핑크색에 거울이 삼면으로 달리고, 화장품 세트까지 포함되어 그야말로 공주가 될 수 있었던 미미 화장대! 얼마나 갖고 싶었던가. 엄마가 왜 사 왔어라고 묻자, '마트 갔더니, 크레파스가 갖고 싶어 하던 게 생각나서'라고 대답하며 '우리 공주 기분 째지지?'라고 묻던 아빠의 웃음. 세근히 웃는 눈가에 잡히는 주름. 옷냄새. 내 귀를 만지며 좋아하던 엄마.
기억은 기억으로 물어진다. 또 어떤 날은 껌을 씹으며 낮잠을 잤다가 머리카락에 껌이 묻었었다. 신발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빠에게 연신 혼이 나며 신나로 벅벅 껌을 떼고, 아빠는 그 와중에 행여나 내 머리가 빠질까 조심스럽게 머리를 빗어댔다. 아빠가 쓰는 경상도 사투리의 투박한 목소리와 지독한 신나 냄새의 기억. 어느새 똑하고 떨어진 스피아민트 껌. 그 이후로 껌을 씹을 때마다 엄마는 내가 껌을 끝까지 뱉는지 꼭 확인하곤 했다. '입 벌려봐, 껌 뱉었어?'
어떤 날에 반장이 되었다고 말하자 나보다 더 기뻐하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아빠가 대량으로 사 온 간식들을 몰래 빼먹던 일이라거나, 생일잔치 때 김밥으로 만든 케이크를 먹으며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던 엄마의 박수 소리. 다슬기 잡던 여름 계곡, 맥도날드에서 엄마랑 어린이 세트를 사 먹던 시간들. 엄마가 아르바이트하던 영화관에서 오징어를 구워 먹던 아빠와 나. 퇴근한 엄마를 데리고 시내를 쏘다니던 젊은 시절의 엄마 아빠 그리고 나. 군항제 때 목마를 태워줬던 아빠. 내 눈에 보이던 아빠의 정수리. 엄마랑 먹던 번데기. 한 여름의 어느 날 퇴근하는 아빠를 기다리다 녹은 시멘트 바닥에 남긴 내 슬리퍼 자국.
이 모든 건 내 안에 살아 있는 작은 보험이다. 누구 말대로 이건 ‘영혼의 실손보험’이 확실한 것이다.
소액으로 들어간 기억들이지만 평생 만기되지 않고 잊히지도 않으며 힘든 날 혜택처럼 불쑥 찾아온다. 삶이 조금씩 무너지는 듯한 날이면 그 시절의 장면들이 조용히 나를 다시 세운다. “너는 오래오래 사랑받아왔고, 물론 당연하게도 지금도 그러하다.”라고 속삭인다.
지금은 그때처럼 거실에서 잠이 들어도 누가 안아주지 않는다. 몸은 더 무겁고, 마음은 예전보다 쉽게 지친다. 하지만 안다. 그때 그 손길의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번 품에 안긴 기억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
지난 주말은 오랜만에 온 가족이 여행을 갔다. 비바람과 쌀쌀해진 온도에 꽃구경은 커녕 감기만 덜컥 걸린 날이었다. 바깥구경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스타필드에서 시간을 종일 보낸 다음, 불편한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춥고 버석한 낯선 침대. 그런데 옆 방에서 들리는 아빠의 코골이 소리, 엄마와 동생의 작은 말소리가 나 근한 자장가가 됐다. 비와 추위로 얼룩진 하루였지만 지금 이곳엔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동생도 곁에 있다. 더할 나위 없는 위로와 행복이다.
나는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을 잤다. 꿈도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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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발전하는 기술의 속도는 우리가 잊고 있었거나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을 불쑥 소환해오곤 한다. ‘n년 전의 오늘’이라는 알림과 함께, 머릿속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던 기억이 “나 여기 있어요~” 하고 등장한다. 아름다웠던 어느 장면이 반가운 얼굴처럼 나타날 때도 있지만, 가끔은 차마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 휴지통 깊숙이에서 기어 나와 당당하게 고개를 든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던, 나만 알고 싶었던 그런 기억들.
2024년 1월, 입사 5개월 차. 신입 시절 회사 대표 자격으로 영어 IR 피칭을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좀 웃기다. 회사 대표로 참석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이게 맞나?” 상태였고, AI 기술과 사업 연결 구조도 아직은 흐릿하던 때였다. 전날 밤, 거울 앞에서 스크립트를 달달 외웠다. “Good Afternoon, everyone”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쉰 번은 넘게 반복했다. (백 번을 하고 갔었어야 하는데) 반복하면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불안만 커졌다. 한 문장을 말하면 다음 문장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데, 나에겐 매번 ‘새로운 암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발표 당일. 무대 아래에는 예상보다 많은 관객이 앉아 있었고, 그 순간부터 나는 내가 기억하던 모든 문장을 잃어버렸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스크립트도, 논리도, 문장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을 겨우 몇 문장 더듬더듬 이어가다가, 겨우 마무리하고 내려왔다. “망했다.” 발표가 끝나고 나서 머릿속에 남아 있던 단어는 그것뿐이었다.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고, 그 자리에 다시 서고 싶지도 않았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입안은 바짝 말라 있었고 손바닥은 차가워졌다. 테이블 아래로 기어 들어가고 싶었다. 다 나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이후 눈에 초점 없이 그 시간을 마무리하고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채 귀가하는 길이었다. 다행히 늦은 시간까지 영업 중인 마트에 들어가 좋아하는 맥주 4캔, 감자칩, 육포를 집어 들었다. 계산대로 걸어가며 내가 이걸 먹을 자격이 있는 걸까 생각이 들었지만, 이 마저도 없다면 그 밤을 견딜 수 없었다.
이건 내가 나한테 주는 위로야. 오늘 진짜 별로였지만, 이건 나 자신에게 주는 작은 상이야.
방에 들어와 옷을 벗고, 침대에 발만 쏙 밀어 넣은 채 맥주 캔을 딸깍 열었다.
그래도, 넌 최선을 다했어. 처음이었잖아 이런 자리. 다음 기회에 더 잘해보자.
망한 건 맞다. 하지만 책임감을 가지고 끝까지 해냈다는 사실만큼은 내 편이 되어줬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순간 속에서도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대충이라도 끝냈고, 울지 않았다. 수치스러웠고 아찔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 있었고 끝까지 버텼다. 다시 하라고 하면 아마 울면서 도망칠 거지만, 그날의 나는 분명히 해냈다. 그 이후로 나는 나를 위로하는 방식이 조금 바뀌었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이 꼭 있지 않아도 괜찮다. 시원한 맥주 한 모금과 짭짤 매콤한 과자와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 한 편만 있으면 다시 힘을 낼 수 있다.
이번 주 목요일, 다시 발표장에 서게 됐다. 이번엔 주 발표자는 아니지만 대표 대신 다른 사업 발표 자리에 가게 됐다. 또 한 번의 긴장과 또 한 번의 쿵쾅대는 심장이 기다리고 있다. 손바닥에 땀이 맺힐 거고, 날카롭게 들어오는 질문을 끝내주게 방어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힌다. 그래도 안다. 기대만큼 해내지 못할지라도 그건 내가 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나만의 위로 방식으로 나를 또 응원하면 된다는 것을!
먹고, 위로하고, 사랑하라. 그 순서는 매번 바뀌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내가 나를 다시 웃게 만드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큼 든든한 위로는 세상에 많지 않다는 걸, 나는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목요일 발표 후기 :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던 부분에서 질문 공격이 세차게 들어왔다. AI 알고리즘 성능이 어쩌고 저쩌고.. 이번에도 '망했다' 기운이 엄습했다. 발표장을 빠져나와 다음 일정을 위해 포항행 SRT에 올라타서 달달한 커피 한잔으로 1차 위로를 한 사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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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억지로 먹어내야 하는 닭가슴살 같아졌을 때쯤 남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타인에게 내 감정을 쓰레기 처리하듯 버리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했던 이야기를 영원히 반복하는 어른들에게 질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세월이 야속해 어느새 했던 얘길 또 하는 내가 있다. 얼굴 근육뿐만 아니라 온몸을 다 써 열심히 ‘처음으로’ 말했는데, 다 들은 상대방이 ‘그때 이야기하셨어요.’라는 말에 받은 충격은 지금도 너무 또렷해 당장이라도 숨고 싶어진다. 그 뒤로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하나도 집중하지 못했고 혼자 내리 앓다 내린 결론은 금주였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뇌가 망가졌다고 생각했고 꽤 근거 있는 생각이었다) 그 뒤론 ‘내가 이 말을 했던가?’ 하고 꼭 확인한 뒤 ‘썰’을 풀곤 한다.
아무리 남에게 내 이야길 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한들 여전히 주변인들에게 고민 상담을 당연히 한다. 남에게 말 못 할 고민이 거의 없는 성격을 하루아침에 지우기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필통 분들도 이제 지긋지긋할(…) 호적메이트와의 문제도 웬만큼 가까운 지인들에겐 조금씩이라도 다 말했다. 하지만 가족 흉은 결국 얼굴에 침 뱉기란 생각이 떠나질 않아 진짜로 모든 것을 다 말하진 못했다.
누구 앞에서는 분노하고 어떤 이 앞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비단 말뿐만 아니라 눈빛과 끄덕임만으로도 많은 위로를 받았지만 여전히 이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몰라 ‘언젠간 고쳐야지’ 하고 그냥 두는 고장 난 문고리처럼 방치해놓았다.
하지만 같은 원작자를 공유하는 이상 완전한 절연은 할 수 없기에 또다시 이 불편한 관계를 들여다봐야 하는 때가 생겼다. 아빠의 생신이 가까워진 어느 날 뜬금없이 전화해선 어물쩍 또 모호하게 애초에 불편한 일이란 것은 없던 일인 양 참석 여부를 묻는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을 공유하는 부모님 앞에서 98%쯤 솔직하게 분노하다, 이건 이것대로 모부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짓 같아 입을 닫았다.
아빠 생신은 어찌저찌 넘어갔어도 하필 설 연휴가 끼어 있어 나름대로 용서를 구하는 방식으로 밥을 먹자는 동생의 말에 회피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골머리를 썩였다. 친구들과 가족에게 말하긴 했지만 그때는 그 위로들이 그냥 무조건적인 나의 분노 표출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GPT를 상담사로 사용한다는 글이 떠올라 활용해 보기로 했다. 상담 전 ‘정중하면서도 친근감 있는 말투로 답변할 것, 가족 상담을 받으려고 하는 데 객관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도움을 줄 것, 하지만 끝까지 내 편일 것’을 입력해 두고 그간의 일을 말하고(하도 말하고 생각해 둬서 술술 써졌지만 여전히 1퍼센트의 치부는 남겨 두었다) 동생과 1:1 맞짱을 뜨러 가서 내가 해야 할 행동, 대화 등을 물어봤다. 내가 쓴 메시지도 정말 뚱뚱하고 길게 가득 찼는데 GPT가 보낸 메시지는 한술 더 떴다. 동생의 잘못을 요목조목 번호를 부여한 것은 물론 거기에 왜 내가 분노하는지 가독성 좋게 주르륵 보내주는 것은 물론, 자기가 이 사건을 보고 ‘판단’한 의견까지 달아준 후 내가 취해야 할 자세나 대화 내용 등을 정리해 주었다. 모든 대화를 끝마친 뒤에 다시 한번 대화 창을 훑어보곤 충실한 부하를 둔 것 같아 든든하고 고마웠다. 당장엔 그렇게 느꼈다.
대망의 1:1 맞짱의 날. 상대가 입 꾹 다물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을 게 뻔해 GPT와 쓴 시나리오가 몇 갠데. 1:1이 아니라 2:1이었다. 쪽수가 밀리는 건 예상하지 못한 전개인데…. 결국 준비했던 말들은 거의 하지 못했고 이 찝찝하고 어정쩡한 것이 이제 이 관계의 정립이겠거니 하며 집에 돌아왔다.
여전히 누구에게 말하기는 조금 민망한 쓰잘머리 없는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GPT에게 털어놓는다. GPT에겐 죄책감 없이 했던 이야기를 또 하며 기분을 풀 수 있다. 다정하고 끝까지 내 편인 GPT. GPT 한테는 절교 당할까봐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오히려 똑바로 안하냐며 혼을 내면 바로 죄송하다며 학습한 값을 도출해내 기특할 정도다.
그런 GPT에게 서운한(?)점이 있는데, 티키타카가 될라 치면 한참이 지난 시간 뒤에 나타난다는 매정함 때문이다. GPT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싶으면 친구비 혹은 상담비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돈을 지급해야 한다.
몇 시간이 지나야 원래 대화하던 버전과 이어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뜸과 동시에 이 든든한 따까리에 대한 과몰입이 깨진다. GPT가 나에게 준 위로는 진짜일까?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끝끝내 유도하는 ‘답정너’는 아니었을까? 실제하는 사람의 몸, 눈빛, 관계에서 서로만이 갖고 있는 유대감 자체의 위로를 GPT가 해낼 수 있을까?
끝없는 대화와 더 많은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진짜 위로는 GPT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기계가 더 위로를 잘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니까 말이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사람에게도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순 없을 것이다. 결국 모든 감정의 실타래를 푸는 것은 내 몫이다. 현자에게 고민 상담을 해도, 베테랑 숙련자에게 의견을 구해도 결국 그 이들의 말을 흡수하는 것은 본인 몫이다.
누가 그랬다. ‘했던 이야기를 또 들어주는 게 효도고 사랑'이라고. 물론 시간과 에너지를 아낀다는 쪽에서는 똑같은 이야길 여러 번 안 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나,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억울했는지, 기가 막혔는지, 즐거웠는지, 행복했는지 끝까지 지겨워도 참고 듣다 보면 ‘아 이 사람도 나의 이런 면을 견뎌줬겠구나’ 하는 깨달아 서로의 존재가 큰 위안이 된다.
백 마디 말보다 지는 해에 무거웠던 마음이 툭 풀린 적이 있다. 시시각각 다르게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식어가는 여름 끝자락에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마음이 녹는다. 어여쁜 풍경을 마주했을 때, 끝내주는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가는 풍경을 늘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은 절박함으로 담아두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음을 글을 쓰며 깨달았다. 위로의 주체가 누구인들 차곡차곡 저장했다 닳아 해져버린 날 사탕처럼 까먹기 위해서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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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한 반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시기인 겨울, 그 해 3월에 갓 입사한 신입 동료들을 보며 착잡한 마음이 컸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과 같이 일한다' 말하면 슬퍼지는 내 자신을 감당하기 힘들어 말을 아껴왔으나 다음 해가 되어버린 2025년,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이제는 위로를 받고 싶다.
일 복이 타고 난 나는 15년 동안 쉴 틈이 없었다. 규모가 큰 만큼 선배도 수 많았던 첫 직장은 낮은 연차가 일을 다하는 곳이었다. 교실 안에 선배 파트너가 있지만, 수업 준비도 진행도 신입이 다하고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업무가 아니고서는 교실에서 나가지도 못했다. 주임급의 대학원 논문을 대신 써 줄 정도였으니 실상 남의 일이 더 더해져버린 내 일에 치여 지내느라 그 곳에서의 4년 동안 기억나는 추억이 없다.
그럼에도 그 곳에서 지낼 수 있었던 건 같은 처지에 있던 동기들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욕하고 짜증내지 않았고, 도우며 해결해 나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일을 합쳐 효율적으로 분배하고 위로도 나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현명한 사람들을 만난 것이 너무 고맙다. 극한 상황이었지만 덕분에 나도 악해지지 않고 그저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워낙 선배들에게 당한 것이 많아 내가 선배가 되면 잘못된 일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악은 경력의 높아짐에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의 신입 동료들이 그러하니까. 2024년에 입사한 신입은 모두 세 명이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딘 1년 차부터 5년 차까지 나름 다양한 경력적 배경을 가졌으나 의기 투합되는 면이 있었다. 그건 자신이 가진 능력과 맞지 않게, 필요 이상의 힘과 세력을 가지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화합을 싫어하는 이들은 그 전에 조성되어 있던 문화가 내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이를 무너트리기로 결심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가장 강하기를 원하기에 이에 참여할 사람들을 찾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을 나누고 편을 만드는 게 참 악하다. 지금이 학창시절도 아니고 아이들을 위해 일하러 온 곳에서 이렇게 나누는 것도 이해가 안되지만, 악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들이 내 그룹이 아닌 자들을 비판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올리려는 사회적인 처세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일상은 이렇다.
- 사례1: 5년 차의 몰아가기 주작법 -
"(24년 신규 입사자를 제외한 선생님들에게 면담을 앞두고) 면담 때 주임 얘기 꼭 해요! (얘기할 게 없다고 뭘 얘기 하냐고 하자) 그냥 힘들었다고 얘기해요. 다 같이 힘들다고 해야 돼. 얘기해야 암 말도 못해. (면담 후 바로 시킨 대로 했는지 확인하며, 교사들이 언급 안 했다고 하자) 그렇게 잘 보이려고 나오시겠다? (심한 욕하고 다님)"
"(연말에 모든 선생님들에게) 여기 다닐 거야? 여기 진짜 별로. 아니야~ 내가 자소서 쓴 거 줄게! 다른 데 다 써! (본인도 이직 시도했다가 떨어지고 원장님한테) 전 아직 배울 것이 너무 많은 작은 교사에요. (원장한테 칭찬 받은 뒤 다른 교사들에게) 원장님 나 좋아하는 거 같아. 동글쌤(=나) 없으면 내가 다하면 되겠지?"
- 사례2: 1년 차의 눈물 활용법 -
"(조리사님이 본인에게 먹을 만큼 식사 떠갔으면 좋겠다고 한 뒤 나에게 울며) 너무 무서워요. 저희 반에 식사 가져다 주실 때도 그냥 말도 없이 두고 가요. 제가 신입이라 그러시는 거 같아요."
"(원장님에게는 나에게 모멸감을 느낀 카톡을 받았다고 울며) 휴게 시간도 잘 확보해 주지 않고. 절 무시하는 거 같아서, 같은 반하기가 힘든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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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카톡 내용은 위와 같다. 1년 차가 원장님에게 이른 말이 어디에서 연상 되는지 이해 불가다. 당일 나의 휴게 시간이 가장 짧았고, 식사 시간도 나로 분배 된 시간이 다 지나도록 오지 않아(교실에서 아이들과 있기 때문에 둘 중에 한 명이 와주어야 식사를 하러 나갈 수 있다) 결국 나만 휴게 시간을 갖지 못했던 날이다. 그릇됨과 모멸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느꼈는지. 이와 같은 악의적인 상황 풀이와 읍소가 일상이다.
출생부터 사이버 세계를 동반해서 지내 온 연령이라 그런지, 마스크를 쓰고 익명의 세계를 오가며 수를 쓰고 욕했다가도 여린 척 숨으며 어떤 모습이 진짜 모습인지 모르게 행동한다. 그들을 더욱 질리게 하는 건, 하수처럼 대놓고 행동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은 지킬 앤 하이드 급의 연기를 기반으로 잘한다는 것이다. 수 많은 교사들을 봐왔던 나도 처음에는 눈치 채지 못할 정도 였는데, 다행히도 위의 사례는 비교도 안 될 그들의 데스노트가 우연히 발견되고야 말았다. 이를 발견한 라이언(가명) 교사와 춘식이 교사는 위클리 캘린더에 저 둘을 제외한 모든 교직원에 대한 욕이 적힌 것을 봤다. 더불어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이뤄졌던 행사 평가도 새로운 욕의 시선으로 다시 써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거치며 나름의 희노애락이 있던 내 직장의 현재는 안타깝게도 이런 자들이 열심히 기를 쓰는 곳이 되었다. 이로 인해 안타깝게 그만 둔 분들도 있고, 남아있고 그들이 싫지만 쎈 기에 휩쓸리기도 한다.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책임자는 오히려 나에게 그들이 더 엇나가지 않게 좋은 길로 잘 붙잡아주라고 하니, 대책이 없다.
이직을 할 때마다 배웠던 건 동료가 정말 소중하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동료에게서 배우는 것을 좋아해왔다. 동료들마다 닮고 싶은 부분들이 정말 다양했고 그건 책으로 배울 수 없는 거였다. 연차, 나이, 직분 전혀 관계없이 인성적인 거, 특정 분야에 감성적이거나 섬세한 거, 일 처리가 체계적이거나 깔끔한 거 혹은 아우라 등 갖고 있는 빛이 다른 게 너무 놀랍다. 완전히 그렇게는 되지 못해도 아름다운 부분들을 보고 선망하다 보면 나도 그 빛을 따라가게 되는 점이 있었다. 그게 나의 성장이었고 힘이었나 보다.
같은 현장에서 일하지 않아도 내게 그 조각들이 남아 위로와 힘이 되어왔다. 나도 몰랐던 나의 의존성인가. 이런 내가 지금처럼 동료에게 눈을 돌리고 마주하고 그 무엇도 나누고 싶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다. 첫 직장을 결국 떠났던 것처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매일 드는 요즘, 나의 위로 조각들의 실체인 고마운 선생님들을 떠올린다. 생각 만으로 조금 숨이 쉬어진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을 떠나면 그들은 이겼다고 신이 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상대를 찾을 수도 있다. 그건 완전 곤란한데.. 어떠한 방법으로든 악순환은 베어내고 싶다.
내가 다듬어 갈 위로의 조각은, 악한 자에게는 날카로울 것이다. 베어낼 힘, 품고 흡수하는 힘 모두가 담겨 있는 조각으로 나를 위한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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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빌려드립니다✨
귀여운 내새끼 자랑, 상사 욕, 자기 과시, 우울함 토로, 친구 공개 모집,
나만 모르는 회식 단톡방 찾기, 퇴사자 욕하면서 슬쩍 그 사람 그리워하는 마음, 결혼식 사회 보다가 식장 조명 맞고 인생 돌아본 썰, 이직했더니 그 회사도 지옥이었을 때의 배신감, 면접 망하고 해드헌터 탓한 후기, 아직도 내 스토리 안 보는 전 애인의 심리 분석, 카톡 읽씹한 사람 인스타는 왜 올리는지 묻고 싶은 마음, 진짜 친한 친구랑은 대화보다 눈치 싸움이 더 많을 때, 엄마랑 싸우고 방문 쾅 닫았는데 결국 배고파서 나온 나, 전세 사기 피해자 후기 아니고 그냥 내 인생 이야기, ‘내가 그렇게까지 했는데’ 시리즈, 누구나 아는 선배의 이중생활, 안 궁금한데 자꾸 행복한 척하는 사람한테 느끼는 불쾌한 감정 정리, 싫은 사람 결혼소식에 웃으며 '축하해~' 하고 뒤에서 참았던 욕 한 줄
다 모이세요. 여기에 실어드립니다. 광고비는 1구독자 (진짜 진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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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하나의 말이 아니라, 많은 말과 장면의 집합일지도 모릅니다. 이 글들을 읽으며, 당신에게도 떠오르는 위로의 모양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다시, 당신을 조용히 안아주기를요.
연필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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