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적정 라인 초과
둥굴게 돌아가는 건조기를 유심히 바라본다.
빨래를 말리려 열심히 돌아가는 최첨단 기계를 보고 있자니 세상 좋아졌구나 감탄이 나온다.
감탄도 잠시, 건조기 유리에 노란색 점선과 함께 적힌 유의사항을 가만히 읽어본다.
적정 라인 투입
---------------------------------
안내선을 초과하면
건조 품질이 저하될 수 있습니다.
매 주 마주한 물건인데 오늘따라 유독 이 문구가 눈에 띈다.
아무래도 요즘 사람에 지쳐버린 내 마음 때문일까.
'사람 개 좋아' 인간에서 '사람 x나 싫어' 인간 헤이러가 되버린 요즘 내 상태가
세탁물로 가득 차 힘겹게 돌아가는 건조기처럼 느껴진다.
겨우 동작하고 있지만 품질이 저하된 건조기.
그동안 내 마음 속 적정 라인의 여유가 없음에도 기꺼이 남들에게 마음과 배려를 내어주고 있었다.
무리해서 웃어보이고 괜찮단 격려를 내가 아닌 남에게 열심히 내어줬더니 주말만 되면 입을 꾹 닫고 그저 누워있는 방전 상태가 되곤했다.
겨울을 지독히도 싫어해서 새순이 돋는 초봄만 되도 밖으로 돌아다니기 바쁜 내가, 푸름으로 가득한 4~5월에 집에서만 지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으레 잠도 늘었고 잠이 늘면 그 다음으로 '우울'이란 친구가 찾아오는 걸 알기에 불안함은 더 증폭되었다.
고장나기 직전 같은 나날을 보내던 중 나는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디자이너인데 디자인 해본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해.'
'서비스팀을 잘 정착시키겠단 마음으로 옆에서 마이크로 매니징을 했더니 쫄보들이 되서 별거 아닌 일에도 나를 찾아.'
'나를 찾는 일이 잦으니 내가 해결해주는 것이 당연해지고 그들은 레벨업되지 않고 나의 도움을 너무 당연시하게 여겨.'
'개발팀에도 전달되야 할 일들을 내 선에서 컷해서 다 처리해버리니, 개발자들은 기능 개선을 하고 싶어도 못해. '
'7시에 모두가 퇴근하고 그제서야 내가 해야할 일들을 해. 그러니 퇴근이 늦고 피로도가 쌓여. '
위태로운 나의 외줄타기 곡예를 보던 리더와 팀원들의 괜찮냐는 물음에 평소처럼 괜찮다고 답하지 못했다.
"저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 이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서비스팀 업무 미숙으로 다른 팀원들에게 피해가 안 가게 하려고 제가 열심히 몸빵했는데 지쳐요"
넋이 나가 줄 위에 걸터앉아 있는 나를 향해 팀원들은 냉혹하고 현실적인 피드백을 건네주었다.
"저희도 알아야할 내용들이 분명히 있는것같은데 지선님이 다 컷해버리셔서 서비스가 더 개선될 수가 없어요."
"제가 서비스팀 A에게 어떤 메일을 보내라고 애기했는데, 지선님 오시면 할께요 라고 말하고 자꾸 일을 미뤄요."
"넘어지는 아이를 안 넘어뜨리려고 매번 걸음을 체크할 순 없어요. 넘어졌으면 툭툭 털고 일어나는 법을 그들도 배워야해요. "
"지선님이 서비스팀 도와주는거 안했으면 좋겠어요. 디자이너는 혼자인데, 디자인을 해야죠. 개발팀이 이제 마크할께요"
이런 피드백을 듣고 있는 내 표정은 어땠을것 같은가.
MBTI에서 F가 80%인 나는 솔직히 서운했다.
내가 힘들었고 고생해준건 왜 인정을 안해주지? 다른 멤버들이 피해보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한 행동인데, 왜 내 마음은 몰라주지?
그런 서운함에도 이들이 나를 위해 용기내 꺼내준 말들이 다 맞는 말이라 반박 불가였다.
기운내자며 삼겹살을 먹으며 직장생활을 이렇게 오래해도 피드백 받는건 여전히 너무 힘들다는 토로에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개발자가 해준 말이 기억에 남는다.
"힘들죠. 근데 저는 그냥 캐해라고 생각해요.
저 사람이 내 캐릭터를 저렇게 해석하고 있구나, 그냥 사주풀이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요."
그래, 그들은 나를 잘못했다고 뭐라고 한게 아냐. 캐릭터 해석도 애정이 있어야 가능하지.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을 나는 '빌런'으로 해석했다. 해석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로한다, 말 그대로 그건 내 해석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 속에 부글부글 끓었던 감정들이 천천히 소화되기 시작했다.
다음날, 서비스팀을 소집하여 지친 내 상태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원래 내가 있어야할 자리로 돌아가겠다 애기했다.
앞으로는 개발팀과 업무를 처리하면 되고 그동안 일 처리방식에 대한 아쉬웠던 부분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들은 살짝 허탈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나의 '빌런'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모두를 당황하게 했지만 예전만큼 화가 나진 않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빌런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뿐.
모두에게 말한 후 좀 더 가뿐한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퇴근 후엔 밀린 빨래를 하러 빨래방에 가야지.
오늘은 어쩐지 빨래가 더 뽀송하게 건조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