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내 이름에는 색이 들어가 있다. 덕분에 학창 시절 내내 ‘각자 자신을 표현하는 색을 골라보세요’ 라거나 친구들끼리 롤링페이퍼를 써야하니 각자 색 하나씩을 골라야 할 때 등의 상황에서도 난 고민 없이 이름에 맞춰 색을 고르곤 했었다. 때문에 즐겨 찾는 색이라거나... 좋아하는 색도 자연스레 그 색이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어느새 옷도 소지품도 대부분 그 색으로 가득 차게 됐다.
차차틴트가 대 유행이던 시절 나는 20대 초반이었고 차차의 유행으로 코랄이 급부상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차차틴트의 벽은 가격이었기에 대딩인 나는 자연스레 저렴이 버전을 사용해야했다. 저렴해서 그런건가.. 짝퉁이라 그런건가.. 아무리 바르고 또 발라도 겟잇뷰티 속 유진처럼 화사해지진 않았다. 안색은 오히려 나빠지기만 했다. 아무래도 학과 특성상 밤샘 작업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입학 3달 후 오랜만에 만난 아빠는 내 얼굴을 보며 계속 ‘얼굴이 노랗다’, ‘대학생이 되더니 얼굴색이 점점 나빠만진다’고 걱정을 해댔다. 소녀시대 태연을 보고 영감을 받아 염색도 하고 스키니진에 멋도 부렸는데 꼴이 나쁘다니.. 대학생이 되니 낭만은커녕 추운날 밖에 서있고 더운 날 밖에 서있는 영화현장만 돌아다녀야 한다는 분노가 가득 차있던 터라 역시 대학을 잘못갔다는 후회를 했다. 아빠 말대로 얼굴색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그리고 어떤 때에 나는 이제 20대 중반이 되었다. 20대 초반엔 얼굴색이 나빴지만 지금은 그냥 닥치는대로 살고 있었다. 취업은 잘 되지 않았고 진로는 막막했기에 연예인들이 뭘 바르는지 뭘 입는지 모르겠고 그냥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퍼스널컬러라는 것이 이 세상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계절과 온도에 맞춘 나만의 색깔을 찾으라나.. 화장을 평소 하는 타입도 아닌데다 그냥 살고 있던 터라 퍼스널컬러니 퍼블릭컬러니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슬기언니에게는 다른 문제였다. 언니는 퍼스널컬러의 추종자가 되어 세상의 모든 색과 톤을 외우고 다녔기 때문이다.
‘여름 쿨톤이 걸어 들어온다.’
오랜만에 만난 슬기 언니는 날 보자 주문을 외우는 듯이 말했다. ‘크레파스 그 입술 당장 지우고 이거 발라봐’ 내 가방을 뒤져 코랄색 더페이스샵 립스틱을 뺏더니 본인 파우치에서 핑크색 샘플 팔레트를 꺼냈다.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샘플들을 많이 받아뒀단다. 납작한 샘플에 붓을 문대 능숙한 솜씨로 내 입술을 채우더니 언니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내 주변에도 드디어 여름 쿨톤이 있다. 난 다 채웠어.'
언니는 갈웜이라고 했다. 가을웜톤을 줄여서 갈웜이라나.. 원래 좋아하던 옷 스타일이 마침 갈웜과 맞아서 옷 살일은 줄었다며 나보고 이참에 옷도 화장품도 싹 바꾸라고 '지시' 를 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 중에 여름 쿨톤이 없어서 마침 찾고 있었는데 나를 발견한 후 드디어 사계절을 다 채운 퍼즐이 맞춰졌다며 기뻐 죽겠다고도 했다. 기념이라며 헤어지는 길에 올리브영에서 틴트도 선물해준 슬기 언니는 여름 쿨톤에게 어울리는 옷 색, 머리 색, 립스틱 색 등을 카톡으로 보내주며 흡족해 했다. 연보라색.. 파란색.. 하늘색.. 흰색.. 이 잘 어울리고.. 채도가 낮고.. 쿨하게.. 머리는 자연흑색이 젤 좋고..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엄마 나 아는 언니가 그러는데 흰색이 잘 어울리는 여름쿨톤이래!’ 라고 하자 엄마는 ‘흰색이 안 어울리는 한국인은 없어. 백의 민족이 왜 나왔니’라며 퍼스널 컬러의 존재를 부정하며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요즘 엄마의 최대 관심사는 '나는 무슨 톤이야? 봄웜이야? 갈웜이야? 난 쿨톤이야?' 하고 매일 물어보곤 한다. 즉, 퍼스널 컬러가 최대 관심사인 듯.)
나는 슬기 언니의 조언대로 애매한 갈색 머리를 검은색으로 덮었다. 화장품도 조금 많이 바꿔야 했다. 일단 차차틴트 저렴이들을 버렸고, 때 마침 취업을 했기에 거금을 들여 바비브라운 가서 립스틱을 샀다. 옷도 다 새로 사야하나 싶어 옷장을 열어보니 다행히 이름따라 산 옷들이 빼곡해 다행히 옷 쇼핑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연보라색이 여름쿨톤에 잘 어울려서 천만다행이지. 한 때 꽃무늬들을 좋아해서 노랑, 주황, 초록 계열의 옷들이 많았는데 이제 이걸 못 입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안 좋기도 하고, 돈도 아까운 것 같으면서도 또 한켠으로는 그간 잃어버린 나의 색을 찾는.. 마치 오즈의 마법사의 영화 한 장면 같은 느낌이 들어 오묘해졌다. 마침 취업덕인지 뭔지 아빠가 문득 ‘얼굴색이 화사해졌다’라고 말한다.
사실 슬기 언니의 단언 이후 진지한 퍼스널컬러 진단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그냥 그 날 이후로 10년 넘게 스스로 여름 쿨톤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때때로 노란색이나 주황색 옷이 입고 싶어질 때가 있지만 애써 '나는 쿨톤이라 어울리지 않지'라며 마음을 접는다. 스스로 '주황색이 안 어울리는 사람!' 이라 고정하며 수지가 쓰는 은은한 레몬색 볼터치가 이뻐보여도 참고, 생제임스의 화사한 노란색 줄무늬 티도 참으며 내 안에 박혀진 '쿨톤'의 명패를 계속 상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느 때 친한 친구가 생일파티를 한다며 드레스 컬러로 '노란색'으로 지정했을 때 나는 약간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노란색 없는데.. 아니 잘 안 어울리는데.. 얼굴 누렇게 뜨겠네.. 그치만 내 생일도 아닌 친구의 생일인데 내 얼굴이 누런게 무슨 소용일까. 아니 어쩌면 누래진 얼굴도 드레스 컬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옷장을 한참 뒤져 노란색 원피스를 발견했다. 쿨톤의 저주에서 딱 한번 일탈을 해보자며 샀던 노란색 원피스. 한번 입고 박아둔 그 원피스를 오랜만에 꺼내 걸쳐보니 의외로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저주가 풀렸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몇 번 노란색 원피스는 내 몸에 걸쳐지곤 했다. 그때 꽤 잘 어울렸기 때문일까, 친구들과의 생일파티가 꽤 즐거웠었기에 기억이 좋았기 때문일까. 두어번 더 입고 나니 톤이고 나발이고 그냥 좋으면 입어도 되겠다 라는 생각이 확신이 들었다. 쿨톤이지만 노란색을 잘 입는 사람. 뭐 어때요.
사실 여전히 내 화장대는 핑크색 립스틱으로 가득 차있고, 코랄이나 오렌지 같은 색은 지양하고 있긴 하지만 옷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도전을 감행해보고 있다. 솔직히 핑크 뿌리면 형광등 백.개.킨.외.모.가 되긴 하고 코랄 뿌리면 우환있는 사람처럼 어두워지는 것도 맞긴 한데 요즘은 그냥 좋으면 입고, 바르고 싶으면 바르고, 사고 싶으면 사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더 크게 떠오르고 있다.
좋으면 입자.. 누가 내 옷 사준 것도 아닌데 좋으면 바르자~ 누가 내 립스틱 사줘봤냐. (슬기언니 제외) 뭐~ 내가 좋으면 되는거지. 그게 나만의 컬러 퍼스널 컬러지! 내 심장이 뛰는 색! 그냥 보라의 팔레트로 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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