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는 노란색 고무 튜브가 있다. 지름 180cm, 등받이, 손잡이까지 있는 이 튜브는 올해 22번째 여름을 맞이했다. 3년 전 등받이가 되는 부분에 미세한 구멍이 생겨 등을 받칠 순 없게 됐지만 아직 튜브로서의 생활은 요즘 나오는 튜브들보다 더 쌩쌩한 현역(?)이다.
이 짱짱한 튜브를 어쩌다 갖게 되었나- 23년 전 여름으로 돌아가 본다.
강원도에 숨겨둔 지분을 의심할 정도로 ‘휴가’ 하면 강원도밖에 갈 줄 모르던 아빠가 무슨 바람인지 땅끝에 가까운 ‘외달도’로 여름휴가 장소를 선정했다. 아무리 땡볕이어도 얼음장같이 차가운 동해와 달리 외달도는 물도 잔잔하고 온도도 적당해서 마음에 들 거라며 호언장담하고 떠났다. 그 말이 복선 아닌 복선이 될 것이라건 아무도 몰랐다.
목적지로 향하는 데만 꼬박 하루를 써 본격적인 해수욕은 이튿날 하기로 했다. 흐렸던 첫날과는 달리 둘째 날은 아침부터 구름 한 점 없고 바람 하나 안부는, 그야말로 물놀이하기에 완벽한 날씨였다. 본격적으로 바다에서 놀려고 튜브를 빌리기로 했다. 동해 해수욕장엔 어딜 가나 멀지 않은 곳에 파라솔, 튜브 대여하는 곳이 있었지만 이 작은 섬은 달랐다. 대여하려면 섬 초입에 있는 해수 풀장으로 가야만 했다. 고민이랄 것도 없이 당당하게 엄마에게 대여 값을 받아내곤 길을 나섰다. 튜브를 타고 노는 것이 더 재밌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길이 멀 텐데 하고 걱정하셨지만 내가 워낙 확고해 말리질 못하셨다.
10분 정도 걸린다는 민박집 아저씨의 말과는 달리 해수 풀장은 너무 멀었다. 양산은커녕 모자도 없이 이미 한 번 바다에 들어갔다가 나온 터라 바지도 축축하게 젖어 있어 돈도 손에 쥐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15분 이상은 걸었던 것 같다.
튜브 없이도 놀 수 있지 않나? 얼마나 걸어온 거지? 꽤 걸어온 것 같은데 더 멀리 가면 어떡하지? 조금만 더 걸으면 나오는데 너무 선뜻 포기하나?
몸에 소금 알갱이들이 자잘자잘 맺힐 때쯤, 손에 쥔 돈이 원래 흐르던 바닷물에 젖은 건지 땀에 젖은 건지 모를 때쯤 어린아이들이 둥실 떠다니는 해수 풀장이 보이고 그 옆에 차곡히 쌓아 올린 튜브 더미가 보였다.
힘든 건 다 거짓인 양 단숨에 달려가 ‘튜브 큰 거 빌리는데 얼마예요?’ 하고 물었다.
대여소 사장님은 내 행색을 훑더니 대뜸 만 오천 원을 불렀다. 우리 가족이 여태 다녔던 동해의 시세는 대여가 오천 원, 구매가 이만 원이었던 시절이다. 그것도 휴가철 바가지요금이라 불만이었는데…. 섬은 섬이라고 외달도의 물가는 살벌했다.
“사는 게 아니라 빌리는 건데요?”
소통에 오류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대여는 만 오천 원이라고 말하곤 아예 몸을 돌려 다른 일을 하기 시작하셨다.
어떻게 온 길인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따가 부모님이랑 꼭 반납하러 올 게요. 만원에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저 외달도 민박에 있어요. 부모님 전화번호 적어드릴까요?"
어떻게든 빌려 가겠다고 한숨에 와다닥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사장님은 다시 나를 보더니 만원만 그 위에 올려두고 가져가라고 했다. 감사 인사를 드리면서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라 튜브 구멍에 어깨를 끼우고 뛰다시피 발걸음을 옮겼다.
민박집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고 더웠고, 튜브에 맞닿은 살엔 땀이 자꾸 찼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오천 원만 주려는 엄마를 다그쳐 동생 것도 빌리게 넉넉하게 달라고 조른 게 참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정작 그렇게 어렵게 빌린 튜브를 가지고 바다에서 얼마큼 놀았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튜브를 가지러 왔다 갔다 한 사이 체력이 빠진 것도 빠진 거지만 간조 때가 되어 물이 얕아져 그냥 튜브를 배에 낀 채 바위에서 게를 잡고 놀았던 기억만 있다.
다음 해 다시 돌아온 여름휴가는 아는 맛 주문진 해변이었다. 동해의 물가는 2년 전과 똑같이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고, 이 정도면 그냥 튜브 하나를 사달라고 부모님께 요구하니 외달도에서의 땡볕 길을 떠올리며 흔쾌히 튜브를 골라주셨다. 지긋지긋할 때까지 끼고 놀라며 제일 질긴 것으로 2만 원에 노란 튜브는 우리 집 여름 식구가 되었다.
가끔 가는 길이 너무 끝없고 막막해 보일 때면 외달도에서 튜브를 빌리러 가던 때를 떠올린다. 가는 길이 멀고 험하면 잡생각도 당연히 자연스레 따라와야 하는데 자꾸만 멈춰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년을 채워가는 연필이 지나온 길을 떠올려 본다.
오로지 하고 싶은 열정만으로 모인 마음이라 강요도 없고 잃는 것도 없다. 때로는 귀찮은 마음이 더 커 조용히 지나갔으면 하는 달도 더러 있었고 나만 놓으면 끝나버릴 모임 같아 의기소침해질 때도 많았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어질때마다 하나 둘 멤버들이 떠오른다.
성심성의껏 자신의 색을 잃지 않고 서걱이는 동글연필 글을 보면 부끄러움과 누가 되지 않고 싶은 마음이 솟는다.
우리의 방향성을 두고 고민할 때, 모두 잊어버린(어쩌면 그러고 싶은) 마감일을 물어보는 연필의 중심 연필심은 그 핵심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연필의 시작, 연필의 간판 마카. 에세이 모임을 한 번 이상 해본 나머지 멤버와는 달리 마카는 도전을 주저하지 않고 그림과 글 장르를 넘나들 우리의 얼굴을 만들어줬다.
크레파스는 색깔이 많은 만능 재주꾼이다. 재기 넘치는 에세이는 물론 총무, 서기, 디지털 도우미 등 맡은 역할이 많음에도 티 내지 않고 묵묵히 연필의 길을 다져준다.
모두가 각자 너무 바쁘고, 밥벌이하며 살기도 빡빡한 일정이지만 그럼에도 연필을 지속하는 이유는 서로의 지지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나 둘이 했으면 금방 주저앉았을 수도 있지만 다섯 명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 없는 꽤 튼튼한 구조로 구성된 모임이다.
지인들로만 구성된 구독자, 영영 오지 않는 피드백. 오래 다녔다고 직급과 호봉이 쌓이는 무능력한 '만년 차장' 같은 세월을 보내는 것은 아닐지 냉정히 생각해 본다. 한 번은 회의에서 '데이터 낭비'하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 보자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잠깐- 우리는, 나는 어떤 마음으로 연필을 시작했더라?
'연대'를 절대적으로 바라는 마음이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또 다른 여성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공감하고 위로받기 위해서.
뙤약볕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이다. 사실 당장에 보이지 않는 결과들로 답답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 기나긴 길을 함께 걸어감으로써 얻게 될 가치를 감히 믿는다. 같은 동네도 아니고 직업도 다 다른 우리를 엮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연필이다.
어쩌면 연필이 가는 길은 외달도에서 튜브를 빌리러 가던 그 길이 아닐까 싶다. 각자의 튜브는 어쩌면 연필 활동이 아닌 다음 가는 곳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계속 걸어가 보자. 전력을 다하지 않더라도, 쉬었다 가더라도, 각자 속도에 맞춰 걷다 보면 어제보다 더 단단해진 연대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