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 막 입학했을 무렵, 엄마가 분무기로 챱챱 물을 뿌린 뒤 참빗으로 머리를 최대한 끌어모아 당겨 머리를 빗겨주는 것을 보던 막내 삼촌이 말했다.
'네가 콩나물이 맞긴 맞나 보구나, 언제 머리에 물 뿌리나 했는데 머리 빗는 핑계로 물 맞았던 거였어.'
진지하게 삼촌은 엄지와 검지 사이에 턱을 괴고는 중대한 단서라도 찾은 양 중얼거리셨다.
'나 밥 안 먹어' 하며 모든 식사를 거부하며 부모님의 진땀을 빼놔도 하룻밤 사이에 쑥 커버리던 신비한 묘수를 삼촌뿐 아니라 모두가 궁금해하던 시절이었다.
목구멍으로 음식물이 넘어가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던 감각이 아직 선명하다. 혼을 내도, 어르고 달래봐도 아무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쥐똥만 하게 담긴 밥그릇을 비울 때까지 상을 안 치워도 보고, 배고프다고 할 때까지 아무것도 안 줘보고….
나도 나지만 우리 엄마도 참 독했던 것이 애타는 마음과 다르게 절대 타협하지 않으셨다. 과자로 배를 불리지 않고 햄이나 밥 친구 같은 조미료 치트키도 쓰지 않고 오로지 전통 법으로만.
그나마 한두 숟갈은 좋다고 먹는 달짝지근한 간장 연근조림이라던가, 순하게 간을 해서 끓인 뭉글한 순두부찌개는 엄마의 필승 무기였다. 하지만 매 식탁에 치트키를 칠 순 없으니 성공 확률은 썩 좋지 못했다.
무엇보다 젊었을 적 엄마는 분노 조절 능력이 나에게만 아주 박해서 글자 그대로 밥상을 뒤엎었던 적도 더러 있었다. 누가 누가 더 독한가 대결로 번졌던 기연깎 식사 시간은 대부분 구토로 막을 내리곤 했다.
안 먹을 거면 치워 하고 밥상을 엎는 엄마 덕분에 다행히(?) 가리는 음식 없이 오히려 다른 아이들은 피하는 채소, 생선 등도 먹으면 먹었다. 잘 안 먹는 건 정말 단순히 배가 고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 했던가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 잘 먹나요'를 방패로 전국의 수많은 사람이 각양각색의 젓가락질을 정당화했거늘. 나도 올바른 방법과는 거리가 멀게 젓가락질하며 밥을 먹었는데 아빠는 항상 이 점을 지적하시곤 했었다. 그러다 막 중학생이 된 어느 날이었다.
'젓가락질 똑바로 하라고 했지?' 하고는 아빠가 젓가락으로 이제 막 반찬을 집으려는 내 젓가락을 툭툭 치며 먹지 말라고 크게 소리치셨다. 안 먹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크게 감정이 상해 곧바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엄마나 동생이 밥 먹으라 하며 달래주겠지? 했지만 오산이었다. 억울해서 한다. 하고 그대로 책상에 앉아 연필을 두 개 집어 똑바로 하는 젓가락질 연습을 했고 두 시간 만에 젓가락질을 고쳤다.
당시엔 엄마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나봐 하며 눈물로 베개를 적셨지만 성인이 된 지금 초장에 버릇을 잡아주신 부모님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금 깨달을 뿐이다.
아마 키가 안 컸거나 휘청휘청했다면 엄마는 어떻게 했을까.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으로 내어주던 시리얼과 우유를 더 많이 내어줬을까?
하지만 100일 주사를 맞히러 소아청소년과에 방문했을 때 '다 큰 애를 이제 데려온, 게으른 엄마'라는 눈빛으로 흘기던 의사의 눈빛에 '아기 카드'를 내밀며 오히려 빨리 온 건데 억울한 일이 다반사였고,
'아유 연필깎이는 정말 크다! 엄청 크겠는데?'라는 안 들으면 오히려 낯선 일상이었다. 크는 것과 별개로 텅 빈 수수깡 같은 아이로 자라 부서질까 하는 염려와는 달리 유치원이고 놀이터고 또래 남자아이들보다 당연히 컸기에 골목대장은 따 놓은 당상이고 겁도 없어 벌레고 물고기고 덥석덥석 잡는 아이라 아마 발육면에선 제일가는 효자가 아니었을까 한다.
사춘기 시절을 지나도 체육 시간이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반에서 사리지 않고 온몸 던져 웃기는 애였다. 매주 따로 운동도 했었다. 그날도 시답잖은 개그로 친구를 웃기는 데 성공했다. 숨넘어갈 듯 웃으며 그만 좀 웃겨 하고 친구의 손이 엉뚱한 곳으로 조준해 내 배를 쳤다. 반사적으로 힘을 준 덕에 호들갑을 떨면서 야! 기연깎 배 근육 장난 아니야! 하고 소리쳐 열댓 명의 소녀에게 배를 내어준 뒤 영광스럽게도 '기복근'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유도 모르면서 몇몇 선생님들도 나를 '기복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 뒤로 복근에 대한 집착이 시작되었다.
건강한 이미지와는 달리 늘 항상 예민한 장 때문에 고3 때에는 화장실에서 살다시피 하였고 누구나 앉아있다 일어나면 앞이 번쩍이면서 안 보이는 줄 알았는데 그건 그냥 빈혈과 저혈압 증상이었고 그냥 일어나도 아무렇지 않은 세상을 살게 된 건 정상 체중 범주에 들어온 후의 일이다.
고등학교 진학 기념으로 선물을 사주겠다고 아빠와 백화점에 갔었을 때의 일이다. 강한 조명 아래서 작은 목걸이를 집중해서 보고 돌아섰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일어나려고 해도 온 세상이 빙글 돌고 말할 수 없는 어지러움에 직원들도 아연실색하며 의무실로 안내했지만 눈 한번 질끈 감고 나서 괜찮다며 일어나서 머쓱하게 웃은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한동안 아빠는 살얼음 걷듯 나를 살폈다. 그런 아빠 핸드폰에 저장된 내 이름은 늘씬한 딸❤️이다.
성장기에 잘 안 먹어도 크고 날씬하다며 감탄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그것이 내가 가진 특기고 능력인 줄 알았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애 얼굴에 젖살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고 몸 전체적인 균형에 비해 허벅지가 조금 더 굵은 것뿐이지 오히려 더 건강한 체질인 줄 모르고 거울 속 내가 너무 뚱뚱하고 못나 보였다.
다행히 인생 최고 연비 시절을 찍고 모든 것을 씹어 먹을 수 있는 때에는 마침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서 스스로 번 돈으로 사 먹는 것에 대한 귀함을 배우던 것과 맞물렸지만, 애초에 용량이 적었던 위장에 대단히 먹어봤자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스키니진과 꿀벅지 찬양이 오락가락하던 시절이었다. 건강이 젊음으로 커버되는 줄 모르고 몸을 자로 재고 칼로 뚝뚝 썰어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나 말고도 사회 전반적으로 당연시되고 우선순위가 되었다. 아무리 갖은 노력을 해봐도 상체만 점점 곯아가고 하체는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운동 덕에 더 근육질이 되어갔다. 그게 그렇게 귀한 건지 모르고 근육 주사니, 지방분해 주사니 얼토당토않은 짓을 벌였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던 시절을 지나 '탈코르셋'의 시대가 왔다. (지금은 오히려 역풍을 맞은 듯하지만….) 내 몸이 어떻게 보이든 이제는 건강이 최우선인지 알지만 그럼에도 몸을 재고 따지려 보는 습관이 불쑥 올라올 때도 있다. 외면 탈코르셋은 쉽게 됐는데, 자아를 발견하기 전부터 아니 어쩌면 태어난 순간부터 조인 내면의 코르셋은 언제쯤 다 벗어던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죽을 때까지 두려운 마음으로 체중계 위에 오를 것이다. 남이 보는 내 몸이 문제가 아니라 갈아 끼울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평생을 고군분투하는 관절들을 위해 말이다.
미용과 건강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서 정신을 다잡는다. 크리스마스 나이론, 아줌마라는 호칭이 멸시와 혐오가 되는 세상은 사라지고 자라나는 모든 소녀가 걱정 없이 제 입맛대로 한 큰술 뜨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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